▲ 레알마드리드를 상대로 응원전을 벌인 알라베스 팬들 ⓒ한준 기자
▲ 후반전에 알라베스 팬이 펼친 플래카드. "클럽은 타이틀(트로피) 때문에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덕분에 위대해지는 것이다." ⓒ한준 기자


[스포티비뉴스=비토리아(스페인), 한준 기자] 전반전이 득점 없이 끝나자 표정이 어두운 쪽은 원정 팀 레알 마드리드였다. 레알 마드리드는 데포르티보 알라베스와 2018-19 스페인 라리가 8라운드 경기를 앞두고 치른 3경기에서 득점하지 못했고, 1무 2패를 당했다. 알라베스와 경기까지 기어코 4경기 연속 무득점을 기록했고, 4경기 중 세 번째 패배를 당했다. 

후반 추가 시간 5분이 주어졌을 때 “레알 마드리드가 골 넣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냐”는 핀잔이 나왔지만, 반대였다. 94분 20초에 알라베스의 교체 투입 선수 마누 가르시아의 헤더가 골망을 흔들었다. 추가 시간 5분은 레알 마드리드가 득점하지 못한 시간만 늘렸다. 나바로 왕이 승전을 기념해 ‘새로운 승리(Nova Victoria)’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기원이 비토리아는 지역 역사에 또 한번 큰 승리를 남겼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알라베스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팀이다. 바스크 지방 동쪽에 위치한 알라바주의 주도가 비토리아 가스테이스다. 인구는 25만가량. 비스카야주의 빌바오보다는 적지만, 기푸스코아 주의 산세바스티안보다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 마드리드 꺾은 알라베스 이변, 원동력은 사무국과 서포터의 ‘신념’

비토리아의 최대 스포츠는 다른 스페인 지역과 달리 농구다. 스페인 최고 농구팀 바스코니아가 비토리아에 있는 데, 파산 위기에 몰린 알라베스를 인수해 정상 궤도에 올린 주인공이 바스코니아 운영진이다. 바스코니아-알라베스 그룹으로 새 출발 한 비토리아 프로스포츠는 알라베스가 지난 두 시즌과 이번 시즌까지 연이어 성과를 내면서 상승세를 타고 있다. 

알라베스는 최근 16년간 레알 마드리드에 9연패 중이었다. 2001년 10월 13일 레알 마드리드와 홈 경기에서 0-0으로 비긴 뒤 번번이 많은 골을 내줬다. 마지막 승리는 2000년 5월 6일 원정 경기에서 거둔 1-0 승리. 홈 승리는 무려 87년만. 알라베스는 1931년 3월 8일에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2-0으로 승리했는데, 그다음 홈 승리가 2018년 10월 6일, 무려 31,989일 만에 이뤘다.

역사적인 승리가 이뤄진 에스타디오 데 멘디소로사는 19,461명이 찾았다. 멘디소로사의 수용 인원은 19,840명. 거의 만석이다. 1만 7,800여 석이 시즌권자 소유로 시즌권이 없는 이들은 애초에 티켓을 구하기 어렵다. 레알 마드리드가 방문하는 경기라면 더더욱 그렇다. 

▲ 알라베스 구단은 공동 1위 알라베스를 순위표 최상단에 걸어 자축했다. ⓒ한준 기자
▲ 루카 모드리치를 수비하는 알라베스 선수들 ⓒ한준 기자


불과 9년 전인 2009년, 3부리그까지 추락하며 파산 위기에 놓였던 알라베스는 1부리그에 복귀한 2016-17시즌 리그 9위 및 코파델레이 준우승으로 돌풍의 중심이 됐고, 2017-18시즌 또 한 번 잔류에 성공한 뒤 87년 만에 안방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격파하며 비토리아 지역 축구 부흥을 이루고 있다. 

바스코니아가 유럽 전역에서 바스크 지역과 비토리아 지역의 용맹함과 강인함을 상징하는 것과 달리, 알라베스는 여전히 1, 2부를 오가는 약체 이미지가 짙다. 바스코이나와 알라베스의 운영 주체가 하나라는 것을 아는 이들도 적다. 

◆ 알라베스는 스타가 아니라 지역에 투자한다

경기 전 만난 바스코니아-알라베스 그룹의 스폰서십 매니저 이케르 곤살레스는 “알라베스와 바스코니아를 통합하는 것이 어떻냐는 의견도 있었다. 바스코니아는 유럽 전역에서 유명하다. 하지만 마케팅적인 이유로 알라베스를 바스코니아FC 같은 이름으로 바꿨다간 알라베스 팬들이 우리를 죽였을 것이다. 알라베스는 긴 역사가 있고, 지역을 대표하는 축구팀”이라고 했다.

비토리아 자치 정부 측의 호소를 통해 파산 위기의 알라베스를 인수해 정상화한 바스코니아-알라베스 그룹은 인수 4년 만에 2,100만 유로에 달하는 부채를 ‘제로’로 만들었고, 1부리그로 복귀시켰으며, 레알 마드리드까지 무너트렸다. 농구로 부흥한 기업이지만, 지역을 위해 일하는 바스코니아-알라베스 그룹은 가치를 지키기 위해 헌신했고 결실을 보았다. 

▲ 팬과 하나된 알라베스 선수들 ⓒLFP
▲ 충격패에 고개를 떨군 레알마드리드 선수들 ⓒ한준 기자


알라베스의 성공에 탄력받은 바스코니아-알라베스 그룹은 알라베스 여자 축구팀을 창단했고, 프랑스 소쇼, 크로아티아 NK이스트라, 핀란드 에르쿨레스 등 축구팀을 추가로 인수해 국제적으로 사업 범위를 넓히고 있다. e스포츠에도 투자를 시작해 세계 최대 규모 e스포츠 아카데미를 운영 중이며, 2019년에 자체 e스포츠 팀 창단도 앞두고 있다. 

바스크 지역을 대표하는 4개 팀 중 하나인 알라베스는 지역 출신만 기용하는 아틀레틱클럽, 선수 육성 시스템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레알소시에다드, 인구 2만 7천에 불과한 소도시가 생존하는 법을 구축한 에이바르와 또 다른 가치와 강점으로 바스크 축구 전성 시대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바스코니아-알라베스 그룹의 총괄 디렉터를 담당하는 미켈 바르세나는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국제 사업 부문에 많은 직원을 투입하고 있지만, 스페인 국내 업무와 마케팅, 스폰서십 등에 집중하는 인력만 따지면 사무국 직원 숫자는 우리가 가장 많다”고 했다. 비토리아 역시 스페인을 대표하는 큰 도시는 아니지만, 선진적인 경영 모델과 선수는 물론 구단 직원을 성장과 운영의 중심으로 삼은 방향성은, 레알 마드리드에 거둔 축구 경기 승리를 뒷받침하는 강한 원동력이 됐다.

경기가 열리지 않는 날 알라베스의 힘을 만든 이들이 바스코니아-알라베스 사무국 직원들이라면, 경기가 열리는 90분 동안 선수들이 안간힘까지 쥐어짜게 만든 힘은 골대 뒤에서 쉼없이 노래를 부른 서포터들이다. 스페인에 축구가 들어온 관문 역할을 한 바스크 지방은 기후도 축구장 분위기도, 심지어 경기 스타일도 ‘종주국’ 영국과 닮았는데, 알라베스의 골대 뒤 분위기는 중남미 축구의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중남미 지역 축구장과 달리 질서있고 안전했다. 레알 마드리드를 향한 욕설을 담은 구호는 스페인에서 친구들끼리도 흔히 하용하는 단어(p**a)가 포함된 것 정도였다. 골대 뒤 서포터석에는 어린이 팬도 가족 단위로 함께 노래를 부르며 응원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 알라베스 마스코트도 서포터들이 서서 노래를 부르는 골대 뒤 관중석을 들러 아이들과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 알라베스도 바스크 지역을 대표하는 축구팀 중 하나다. 이쿠리냐 깃발에 축구공을 합성한 응원기. ⓒLFP
▲ 경기 종료 후 아들과 함께 팬들에게 인사한 득점자 마누 가르시아 ⓒ한준 기자


◆ 팬들은 결과가 아니라 가치에 환호한다

바스크 지방은 거친 이미지로 강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열정적인 동시에 신사적이었다. 이날 경기 결과와 관계 없이 알라베스 팬들은 지역과 자신들의 축구 팀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경기가 득점없이 이어진 후반 10분께 알라베스 서포터들은 대형 플래카드를 펼쳐 들었다. 

“클럽은 타이틀(트로피) 때문에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덕분에 위대해지는 것이다. (a un club no lo hace grande sus titulos. Lo hace grande su gente.)”

경기가 레알 마드리드의 승리로 끝났다고 하더라도 알라베스 팬들의 신념을 무너트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후반 추가 시간에 마누 가르시아의 골이 터지자 경기장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고, 이들이 자부한 가치가 경기 결과로도 증명됐다. 

알라베스는 8경기를 치른 시점에 바르셀로나, 레알마드리드와 같은 승점 14점에 도달했다. 8경기를 치른 팀 중 가장 많은 승점을 얻었고, 레알마드리드에 승자승 우위로 1위였다. 알라베스 구단은 알라베스를 1위로 올린 순위표를 전광판에 송출했다. 

FC바르셀로나가 발렌시아와 경기에서 승점 1점만 추가해도 내려올 공동 1위지만, 알라베스 팬들은 행복하다. 앞으로 순위가 더 내려간다고 해도 이들의 축구와 클럽에 대한 사랑과 신념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바스코니아-알라베스 그룹 총괄 디렉터 바르세나는 “바스크 지역이 스페인에서 직접 스포츠를 즐기는 인구가 가장 많다. 우리는 재정의 일부만 선수 인건비로 쓰고 나머지는 시설과 지역 사회 스포츠 시설에 투자한다.”고 했다. 실제로 알라베스의 재정이 정상화된 이후 바스코니아-알라베스 그룹은 몸값이 높은 선수를 영입한 것이 아니라 지역 스포츠 센터 및 설비 확충에 돈을 썼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것을, 바스크 지방과 알라베스 축구팀이 실천에 옮기고, 증명하고 있다.

글=한준 (스포티비뉴스 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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