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TV NEWS=조현일 해설위원] 2015년 2월 8일 안타까운 뉴스가 전해졌다. 36년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지휘봉을 잡았던 ‘포코너 오펜스의 창시자’ 딘 스미스(Dean Smith)가 타계했다는 소식이었다. 대학 동문은 물론 많은 이들이 명감독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스미스 감독은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의 은사로 잘 알려졌다. 조던은 스미스를 ‘제2의 아버지’라 불렀다. 그만큼 많은 영향을 끼쳤다. 조던은 스승에게 NCAA 첫 우승 트로피를 안겨줬다. 1982년 조지타운대학과 결승전에서 경기 종료 17초전 마지막 위닝샷을 성공시켰다. 조던은 “그 슛이 내 농구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고 밝힌 바 있다.

마이클 조던과의 첫 만남

조던의 고교 시절 키는 178cm. 농구선수로서 크지 않은 체구다. 운동신경은 뛰어났지만 그 외 능력은 평범했다. 당시 조던은 야구와 풋볼을 병행했다. 온전히 농구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결국 고등학교 2학년 때 농구팀에서 방출됐다.

방출 설움은 조던에게 새로운 자극제였다. 야구, 풋볼을 그만두었다. 오직 농구 연습에만 몰두하기로 했다. 때마침 키도 192cm까지 자랐다. 1년 6개월 뒤 조던은 농구 명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입학허가서를 우편으로 받았다.

조던을 영입하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던 인물이 있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스미스 감독. 스미스는 조던을 데려오기 위해 그가 사는 윌밍턴까지 직접 찾아가는 열의를 보였다(당시 스미스 감독이 조던에게 보낸 스카우트 편지는 2014년 미국의 한 경매 사이트를 통해 2만 7천 달러에 낙찰되었다).

스미스는 조던의 첫인상을 이렇게 기억한다. “월밍턴에 있는 조던의 집에서 그를 처음 봤습니다. 조던은 말이 없고 내성적이었습니다. 집을 떠나기 싫어했죠.”

스미스 감독은 조던의 부모를 설득했다. “훌륭한 농구선수이기 전에 바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의 교육을 책임지겠다.” 조던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던의 ‘타 힐스’ 행은 그렇게 이뤄졌다.

스미스 감독은 신입생인 조던을 주전으로 출전시켰다. 그의 자신감을 북돋아주기 위함이었다. 당시 대학농구에서 ‘주전 1학년생’은 흔치않았다. 조던은 “나는 대학 진학 전까지 철저히 무명이었다. 그러나 감독은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우리 팀이 꼭 필요로 하는 선수가 바로 너라고. ‘그 말 한 마디’에 내 인생은 바뀌었다”라며 스미스 감독과의 첫 만남을 회상했다.

조던 인생 최고의 감독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3학년 때 일이다. 난 이미 대학 최고의 농구선수였다. 3학년이 되자 팀 역시 내게 거는 기대가 컸다. 나는 학교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고 그 어느 때보다 노력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대를 완벽히 채우지 못했다. 그때 난 골밑에 서서 멋진 덩크슛 기회가 오기만 기다렸다. 수비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 하루는 감독이 나를 불러 비디오테이프 두 개를 보여줬다. 하나는 내가 2학년 때 뛰었던 경기 영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3학년 초반에 치른 경기 필름이었다. 그런데 두 화면 속 나는 완전히 다른 선수였다. 같은 등번호,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데 3학년의 나는 요령만 부릴 뿐 팀의 패턴 플레이를 방해하고 있었다. 감독님은 그 두 개의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말 없는 가르침을 주셨다. 깊은 울림이 전해졌다.” 조던의 회상이다.

스미스 감독의 철학은 ‘연습은 실전같이 실전은 연습한대로’다. 자서전 ‘캐롤라이나 웨이’에서 “재능은 있으나 희생을 모르는 5명보다 능력은 떨어지지만 한 팀으로 뭉치기 위해 노력하는 5명이 더 낫다”라고 적었다.

현재 애틀랜타 호크스 단장 대니 페리는 고교시절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타 힐스의 엄청난 연습량을 본 뒤 지레 겁을 먹었다. 타 힐스는 주전과 후보, 4학년과 1학년 가리지 않고 팀의 결속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 페리는 엄격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분위기를 꺼려했고 결국 스미스 감독의 제의를 거절했다. 듀크 대학으로 진로를 틀었다.

페리는 듀크대 입학 후 승승장구했다.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대학무대를 평정했다. NBA 신인 드래프트에서도 전체 2순위에 뽑혔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학 시절 자신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 받던 릭 팍스, 조지 린치보다 못한 NBA 커리어를 보냈다. 공교롭게도 팍스와 린치 모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출신 선수들이다.

스미스 감독은 선수들의 진로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농구부 모두 충실히 학교 수업을 받게 했다. 학위를 얻을 수 있도록 장려했다. 썩 공부에 취미가 없던 조던도 마찬가지였다. 감독으로부터 갖은 잔소리를 들어가며 열심히 학점을 이수했다. 스미스 감독이 키워낸 선수 가운데 약 97%에 가까운 운동선수들이 학위를 따냈다. 운동부의 학부 졸업률로는 경이적인 수치다.

여전한 스미스 감독의 영향력

조던이 NBA로 떠난 뒤에도 두 사람은 끈끈한 사제의 정을 이어갔다. 생전에 스미스 감독은 “조던에 대한 멋진 기억들이 수없이 많다. 그와 함께 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조던이 헤쳐 온 길을 곱씹어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라며 제자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드러냈다.

조던은 “스미스는 내게 아버지 같은 존재다. 다른 농구부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말한다. 아버지 제임스 조던이 피살됐을 당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 내 곁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셨다. 지금은? 비록 아버지는 없지만 스미스 감독이 변함없이 날 지켜주고 계신다”며 울먹였다. 이렇듯 스미스 감독은 조던에게 대학 지도자 이상이었다.

스미스 감독은 인종차별과도 정면으로 맞섰다. 지난 1967년 흑인 농구선수였던 찰리 스캇의 입학을 승인해 큰 화제를 뿌렸다. 교내에 농구부가 설립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인종차별이 유독 심했던 미국 남부에 위치해있던 터라 지역 내에서 뒷말이 많았다. 그럼에도 밀어붙였다. 흔들리지 않았다.

훗날 스캇은 “농구부가 있는 대학으로 진학해 학교 대표로 코트에 나서기를 간절히 꿈꿨다. 내 꿈을 이루게 해준 스미스는 사제지간을 떠나 남자가 봐도 멋진 분”이라며 변함없는 존경심을 드러냈다. 별세 소식이 전해진 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남부 지역 인종차별을 없애는데 큰 노릇을 한 분이다. 민권운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기자 회견을 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스미스 감독에게 헌사를 바쳤다.

스미스 감독이 타계한 후 그의 유산 관리인이 뒤늦게 사연 하나를 공개했다. 스미스 감독은 200달러짜리 수표 180장을 건네며 “내가 죽으면 곧바로 우편 발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깜짝 선물을 받은 수신자는 자신이 손수 가르친 제자들. 스미스 감독은 200달러짜리 수표와 함께 “내 선물이다. 이 돈으로 저녁 식사라도 즐기라”라는 글귀를 보냈다. 노년에 기억상실증으로 고생하던 와중에도 제자에 대한 애틋한 사랑은 잊어먹지 않았다.

조던을 멋진 사회인으로 또 뛰어난 운동선수로 키워낸 스미스 감독의 대학 시절 은사는 누구일까. 바로 ‘농구의 창시자’ 제임스 네이스미스 박사다. 네이스미스 박사는 스미스 감독에게 농구의 뿌리부터 기본기, 농구공을 대하는 자세까지 농구에 관한 모든 걸 세밀하게 가르쳤다. 조던을 비롯해 스미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수많은 제자들은 알고 있다. 자신들이 바로 스미스 감독의 고귀한 정신을 이어가야한다. 이를 충실히 할 때 ‘농구의 아버지’ 네이스미스 박사의 스포츠 정신도 세대를 거쳐 오롯이 이어질 것이다.

[사진] 1998년 빈스 카터(左)와 딘 스미스(右) ⓒ Gettyimages 

저작권자 © SPOTV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