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 야구에서 유난히 ‘상복이 없었던’ 장효조는 1987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규 시즌 MVP로 선정됐다. ⓒ한국야구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0년쯤 뒤에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을 친다’는 얘기를 듣게 될 또 한 명의 선수를 이 시대를 사는 야구 팬들은 보고 있는지 모른다.

8일 스포티비뉴스는 이정후(20. 넥센 히어로즈)가 한국 야구사에 남을 대기록에 도전하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국내 프로 야구 스무 살 선수 최고 타율은 김현수(2008년 당시 두산 베어스, 현재 LG 트윈스)의 3할5푼7리다. 꽤 높은 타율이기 때문에 그동안 마땅한 경쟁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2위 기록이 1992년 홍현우( .333 당시 해태 타이거즈)라고 하니 1, 2위 사이 차이가 크다. 그만큼 김현수 기록이 독보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프로 2년째인 이정후가 이 기록에 도전하고 있다.

이정후는 7일 현재 타율 3할5푼을 기록하고 있다. 부상으로 두 차례나 엔트리에서 빠진 선수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좋은 타격감을 유지하고 있다. 부상 이후 오히려 타격 페이스를 끌어올리며 개인 기록을 높이고 있다.

이정후는 두 번째 부상에서 복귀한 지난달 19일 이후 이날까지 4할1푼9리의 고타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 페이스를 시즌 끝까지 유지할 수 있다면 이정후는 김현수의 스무 살 최고 타율에 충분히 도전해 볼 수 있다.

이정후는 프로 첫해인 2017년 시즌 타율 3할2푼4리를 기록했다. 올해 또다시 3할대 타율을 올리고 이런 기록들이 쌓여 나가면 이정후도 언제인가는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을 친다’는 선수들 명단에 오르게 될 것이다. <아래 3,000타석 이상 타율 10걸 참조. 현역은 7일 현재>

여기서 잠시 중·고교 시절 이정후에 대해 쓴 졸고 일부를 소개하고 기사를 이어 가려고 한다.

2014년 봄 어느 날, 서울시야구소프트볼협회에 작은 직책을 갖고 있던 글쓴이는 협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구의 야구 공원에 갔다. 구의 야구 공원은 열혈 팬이 아니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동대문 운동장 야구장 대체 구장이다. 서울시 초·중·고등학교 야구 꿈나무들이 시즌 내내 사용하는 구장이다. 일반 관객은 없고 선수 부모들만 조그만 관중석을 채우는 곳이다.

발걸음을 재촉하다 구장 입구에서 오랜만에 이종범 전 한화 이글스 코치를 만났다. “이 감독(은퇴한 선수들에게 글쓴이가 붙이는 직함), 여기 어떻게 왔나요.” “아들이 오늘 경기가 있어서요.” “아, 오늘 휘문고 경기가 있지.”

“그런데 이 감독, 아들내미가 아버지보다 야구를 훨씬 더 잘할 것 같아요. 다리가 긴 걸 보니 키도 아버지보다 더 클 것 같고. 그리고 우투 좌타잖아. 야구 하는 데 좋은 조건 아닌가?”

자식 칭찬하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종범 전 한화 코치 입이 귀에 걸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묻고 또 물었다.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짓던 이종범 코치가 옆에 있던 아내를 소개했다. “내가 까까머리 때부터 취재하던 분이야.”

▲ 제작 김종래 디자이너 ⓒ스포티비뉴스

1989년 봄,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동대문 운동장 야구장에서 봄철대학야구연맹전이 열리고 있었다. 광주일고를 갓 졸업한, 여전히 스포츠형 머리를 하고 있는 건국대 새내기 이종범이 고려대 4학년 기둥 투수 박동희(작고)를 상대로 1경기 2홈런을 때렸다.

프로 야구가 출범한 지 7년째, 한산하기만 한 동대문 운동장 야구장 스탠드가 술렁였다. “저 선수 누구야.” 일반 팬들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호리호리한 몸매에서 나오는, 이종범의 야무진 스윙은 고등학교 때부터 야구 관계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이종범 전 한화 코치 아들이 야구를 하는데, 꽤 잘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소식을 무심코 들었다. 야구인 2세들이 야구를 하는 사례는 예전부터 있었고 대체로 아버지를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이유로 글쓴이는 2013년 구의 야구 공원에서 이종범 아들 경기를 볼 기회가 몇 차례 있었다. 휘문중학교 3학년 때다. 그때 첫인상은 “스윙을 참 예쁘게 한다”였다. 아버지와는 좀 달랐다. 우투 좌타인데 밀어 쳐서 3~유간을 빠지는 안타를 치고 1루로 달려가는 장면이 눈에 쏙 들어왔다. 이정후는 중학교 리그 성적이긴 하지만 그해 시즌 타율 6할을 기록했다.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을 친다’는 선수 예비 후보인 이정후는 그렇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타격의 달인을 설명하는 이 말의 원조인 고 장효조는 선수 시절 어떤 경기력을 보였을까. 고인의 타격 실력과 관련해서는 이런 말도 있었다. "장효조가 치지 않으면 볼이다." 이런 얘기들은 장효조가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고 아직도 야구 팬들의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다.

프로 야구 출범 4번째 시즌이 열린 1985년, 삼성 라이온즈는 전기 리그 1위를 차지한데 이어 여세를 몰아 후기 리그에서도 1위를 하며 한국시리즈를 아예 없애고 우승을 차지했다. 삼성 김영덕 감독은 전해 골라 잡은 롯데에 3승4패로 밀리며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지 못했던 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는지 후기 리그 중반 스퍼트를 하며 한국 프로 야구 사상 유일하게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은 시즌을 만들어 버렸다.

그해 10월 8일 오전 서울 역삼동 동일빌딩 7층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는 시즌 최우수선수(MVP)와 신인왕을 뽑는 기자단 투표가 있었다. 같은 시간 대구 시내 제일모직 공장 수위실 뒤편에 붙어 있는 삼성 구단 사무실에서는 구단 관계자들이 서울에서 진행되는 투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에는 구단 사무국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서 삼성 구단 대구 사무소는 제일모직 공장 입구에 있는 수위실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낮 12시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각, 뜻밖의 소식이 서울에서 들려왔다. 전·후기 통합 우승의 주역인 장효조와 김시진, 이만수가 가운데 하나가 아닌 해태 김성한이 시즌 MVP가 됐다는 것이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김종만 운영부장 귀에는 해태 이순철이 신인왕으로 뽑혔다는 얘기는 들리지도 않았다.

유력한 시즌 MVP 후보였던 장효조는 슬그머니 구단 사무실에서 빠져나와 수위실에서 공장 쪽으로 향해 길게 뻗어 있는 배수로에 걸터앉았다. 장효조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이 얼핏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담담한 얼굴을 되찾았다. 장효조가 시즌 MVP가 되면 현지에서 인터뷰하기 위해 대구로 달려간 글쓴이가 오히려 맥이 더 빠졌다. 장효조와 글쓴이는 잠시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다 씩 웃었다.

웃은 이유는 둘 모두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날 투표 방식은 기자단 13명이 각자 후보 3명을 적어 내는데 1위 10점, 2위 5점, 3위 2점의 점수를 매겼다. 그 결과 홈런 공동 1위, 타율 3위, 타점 2위인 김성한이 타율과 출루율 1위, 타점 3위인 장효조를 89점-66점으로 제치고 MVP가 됐다. 김일융과 함께 시즌 최다승(25)을 기록한 김시진은 52점을 얻었다.

1983년 해태가 우승할 때 이만수가 MVP가 된데 이어 프로 야구 4시즌 사이에 두 번이나 우승 구단이 아닌 구단에서 시즌 MVP가 나왔다. 전례도 있어 장효조의 시즌 MVP 탈락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보는 팬들도 있었지만 상당수 팬들은 장효조가 "상복이 없어도 정말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야구 팬들이 그런 생각을 할 만했다.

2년 전인 1983년 있었던 신인왕 투표에서 장효조는 타율과 출루율 1위, 홈런과 타점 3위 등 뛰어난 성적을 올리고도 OB 베어스 박종훈에게 밀리는 불운을 겪었다. 이른바 '중고 신인'으로 참신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굳이 따지자면 아주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니었다. 장효조는 1982년 프로 야구가 출범하기 전 아마추어 실업 야구와 대학 야구, 고교 야구에서 최고의 타자로 맹활약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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