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12월 장효조 코치(오른쪽)가 이승엽 개인 훈련을 돕기 위해 경산 볼파크 실내 훈련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삼성 라이온스 제공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 친다’ 원조 장효조, 그의 선수 시절은 어땠을까(2)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73년 5월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7회 대통령배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에서 대구상고는 경남고를 4-1로 누르고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했다. 이 대회에서 장효조는 타격 3위(11타수 4안타)를 차지했다.

같은 해 8월 대구상고는 제3회 봉황대기대회 결승에서 배재고를 4-3으로 물리치고 정상에 올랐고 장효조는 15타수 9안타로 타격상을 받았다. 이어 9월에 열린 제27회 황금사자기대회에서는 배명고를 4-3으로 꺾고 그해 3관왕을 차지했다. 장효조는 14타수 6안타로 또다시 타격상을 수상했다.

1970년대 고교 야구는 서울에서만 4개 대회가 열렸고 지방 대회와 전국체육대회를 포함해 요즘의 프로 야구에 못지않은 일정으로 시즌을 치렀다. 그해 고교 2학년이었던 장효조는 서울에서 벌어진 3개 주요 대회에서만 40타수 19안타, 타율 4할7푼5리를 기록했다. 뒷날 프로 야구 역대 통산 타율 1위(3050 타수 1009안타, 3할3푼1리)를 기록하는 대타자의 출발이었다.

고교 야구 대어를 둘러싼 대학들 스카우트 싸움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1970년대 중반 실업 야구는 롯데 등 신생 팀 창단으로 1960년대 중반 이후 또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었으나 고교 우수 선수 영입 경쟁에서는 대학에 밀리고 있었다. 1974년 가을 무렵 장효조는 한양대로 진로를 결정했다. 이 무렵 한양대는 연세대와 고려대에 앞서는 스카우트 능력을 보이고 있었다.

한양대 진학 후 장효조의 타격 기술은 더욱 향상됐다. 대학에 입학한 뒤 첫 출전한 1975년 봄철연맹전에서 타율 4할1푼4리(29타수 12안타)로 타격 2위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장효조는 대학 시절 내내 4할대 타율을 밥 먹듯이 기록했다. 타격상뿐만이 아니다. 장효조는 홈런상과 도루상도 심심찮게 챙겼다.

장효조가 대학 1학년 때인 1975년 6월 서울에서 제1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렸고 한국은 7승1무로 1963년 제5회, 1971년 제9회 대회(이상 서울)에 이어 통산 3번째 정상에 올랐다. 당시 대표 팀에는 김호중 이선희(이상 투수) 우용득 박해종(이상 포수) 강병철 김봉연 김재박 배대웅(이상 내야수) 김우열 윤동균 이해창(이상 외야수) 등 쟁쟁한 선수들이 있었다. 대학 초년생인 장효조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나 불과 1년 뒤인 1976년 6월 네덜란드 할렘에서 열린 제9회 네덜란드 국제야구대회 출전 선수 명단에 장효조의 이름이 오르게 된다. 이 대표 팀 외야는 임신근 김차열 윤동균 이해창 그리고 장효조로 짜였다. 장효조는 이해창 정도를 빼고는 삼촌뻘 대선배들과 할렘 대회,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 한미 친선 사절단 초청 한미야구대회, 국제야구연맹과 세계야구연맹 통합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등에 잇따라 출전했다.

이에 앞서 5월에 열린 대학 봄철연맹전에서 장효조는 35타수 17안타, 4할9푼6리의 높은 타율로 대학 야구에서 처음으로 타격상을 받았다.

1977년은 장효조에게도 한국 야구에도 기록에 남을 만한 해다. 그해 장효조는 6차례 대회에서 112타수 49안타, 4할3푼7리의 높은 타율을 기록해 전해 4할5푼9리(159타수 73안타)에 이어 2년 연속 4할대 타율을 올려 야구 관계자들과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안타 제조기'의 탄생이었다.

그해 11월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월드컵 세계야구대회에서 한국은 결승에서 미국을 5-4로 따돌리고 한국 야구 70년 사상 처음으로 세계 정상에 섰다. 장효조는 이 대회에서 5번 또는 6번 타자로 활약했다.

장효조는 대학 4학년 때인 1978년 시즌 초반 열린 제1회 통일기전국대학야구대회와 봄철연맹전에서 각각 5할5푼3리(15타수 8안타), 5할2푼(25타수 13안타)의 놀라운 타율을 기록했다.

대학 야구 최고 타자 장효조를 둘러싼 실업 구단들 스카우트 경쟁에서 이긴 구단은 포철이었다. 대학 3학년 때부터 롯데와 한국화장품이 경쟁했으나 최종 승자는 포철이었다. 포철은 아파트 등 요즘의 프로에 못지않은 대우를 장효조에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년병 장효조가 속한 포철은 1979년 실업 야구 코리안 시리즈 결승에서 11회 연장 끝에 롯데에 6-8로 져 준우승했다. 이해 장효조의 성적은 뒤에 적는다.

장효조는 실업 야구 첫 시즌을 마친 뒤 입대해 경리단(육군)의 중심 타자로 뛰며 1980년 코리안 시리즈 우승, 1981년 코리안 시리즈 준우승 그리고 프로 야구가 출범한 해인 1982년 종합 우승에 기여하면서 사그라지는 실업 야구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군 생활의 마지막 시즌인 1982년 2푼 차이로 타격 1위를 이해창(한국화장품, 79타수 39안타 4할6푼8리)에게 내준 건 아마추어 시절의 거의 유일한 아쉬움이다.

1978년, 1980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잇따라 출전한 장효조는 1982년 9월 서울과 인천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과 함께 화려했던 아마추어 시절을 마감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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