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내가 죽던 날' 포스터. 제공|워너브러더스코리아
[스포티비뉴스=김현록 기자]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듯한 제목, 포스터 속 부서질 것 같은 얼굴들에 지레 절망을 짐작할 필요는 없다. 고요하게 다가와 휘몰아치는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 제작 오스카10스튜디오 스토리퐁)은 절망 즈음에서 만난 위로의 영화다. 아무도 나를 구하려 하지 않고 나조차 나를 구하고 싶지 않을 때, 말없이 전해진 손길이다. 존재만으로 힘이 되는 단단한 온기가 있다.

형사 현수(김혜수)는 힘겨운 이혼 소송 속에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 무너져버린 삶, 그래도 일이라도 하면 다 잊고 살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복직에 앞서 그녀는 소녀 세진(노정의)의 실종 사건을 자살로 마무리하는 일을 맡는다. 범죄에 휘말려 증인보호프로그램에 따라 외딴 섬에서 홀로 지내던 소녀가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절벽 아래로 사라져버렸다는 내용이다. 섬 사람들, 연락이 두절된 소녀의 가족, 소녀와 마지막으로 만난 순천댁(이정은)을 차례로 만나던 현수에게 사건이 아닌 소녀의 고통이 보이기 시작한다. 현수는 소녀에게서 자신을 본다.

영화는 '고통'을 다루지만 몸부림치거나 울부짖지 않는다. 대신 감당하기 힘든 고통 속에 있을 때 타인의 고통 또한 다시 보인다고 말한다. 고통 속에 타인의 고통을 마주했을 때, 이 영화의 사람들은 그를 동정하거나 나를 위안하지 않으며, 섣불리 위로하지도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 하지도 않는다. 사려깊은 공감과 연대는 고요하지만 힘이 세다.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다가온 한마디 - '네가 남았다'의 울림 역시 그렇다. '내가 죽던 날'의 특별한 힘이다.

'내가 죽던 날'은 진실을 찾아가는 수사물이기도 하다. 현수는 '실종' 두 글자를 '자살'로 바꾸는 간단한 일을 좀처럼 결론내지 못하고 집요하게 소녀를 둘러싼 진실을 찾아간다. 큰 사건 없이 촘촘한 관계를 되짚는 전개는 이유있는 선택이겠으나 지리하기도 하다. 큰 몫을 하는 건 김선영 문정희 이상엽 조한철 김태훈 김정영… 캐스팅이 곧 스포일러일 수 없는 듬직한 배우군단이다. 묵직한 배우들이 역의 크기와 상관없이 알알이 들어차 틈을 매운다.

제 몫 하는 배우들의 고른 호연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교장선생님' 같은 배우들 속에서도 오롯한 존재감을 보여주는 노정의는 다음을 기대하게 하는 발견이다. '말맛'으로 빠지지 않는 이정은은 목소리 없는 섬 아낙이 되어서도 모든 것을 전해내는 경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김혜수가 돋보이기 힘든 중책을 훌륭히 소화한다. 자신의 시선을 따라 관객을 소녀 세진에게 이끌고 순천댁을 마주하게 한다. 그리고 어느새 한결 가벼워진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이야기를 맺는다. 어두운 터널을 통과한 이의 얼굴이 그러할까. 극장을 나설 때, 관객의 얼굴은 그녀의 표정을 닮아있지 않을까.

11월 12일 개봉. 12세 관람가. 러닝타임 116분.

스포티비뉴스=김현록 기자 roky@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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