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 제공|엣나인필름

[스포티비뉴스=유지희 기자]"어떤 외로운 밤에 자신을 사랑할 수 없어 아파해봤던 사람들이 있다. 자신을 견딜 수 없는 밤들을 보낸다. 그런 밤에,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편지 같은 영화였으면 좋겠다."

''벌새'는 누구를 위한 러브레터인가'라는 첫 질문에 김보라(38) 감독은 이 같이 말했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갔고,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라는 말을 덧붙였다.

'벌새'(감독 김보라, 제작 에피파니·매스오너먼트)는 김 감독의 첫 장편작이다. 대학원 시절부터 꾸준히 단편 작업을 해온 그는 리코더를 잘 불어 사랑 받고 싶은 초등학생 은희의 이야기를 다룬 '리코더 시험'(2011)을 장편화해 '벌새'를 내놨다. 영화는 1994년을 살아가는 14살 은희(박지후)의 평범하지만 특별한 이야기다.

'벌새'는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첫 공개된 후 국내는 물론 제18회 트라이베카 영화제, 베이징국제영화제 등 해외 영화제에서 대상, 여우주연상, 촬영상을 받는 등 전세계 영화제 및 시상식에서 25관왕이라는 기록을 냈다. 신인 감독으로는 이례적이다.

최근 서울 사당동 아트나인에서 '벌새' 개봉을 앞두고 있던 김보라 감독을 스포티비뉴스가 만났다.

-개봉을 앞두고 바쁘겠다.

"실감이 안 난다. '오늘은 뭐하지?'라며 미션들을 하나 하나 클리어하듯 보내고 있다. 이제 곧 '벌새' 무삭제 시나리오와 작가 5명의 비평이 실린 책이 나온다. 너무 할 일이 많다. 출판 인쇄 전, 오늘까지 최종 점검을 해야 하는데 바빠서 하루만 늦춰달라고 했다.(웃음)"

-'벌새'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이후 여러 영화제에서 선보였다. 한국 개봉에 특별히 기대하는 점이 있나.

"별로 생각을 많이 안 해봤다. 독립영화를 즐겨보지 않는 분들도 '나도 90년대에 학교 다녔는데'라고 생각하고, 본 뒤에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영화였으면 좋겠다. 개봉 후에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하지만 SNS에서 영화 평들을 찾아보고 있긴 하다. 건강을 위해 이젠 안 봐야 할 것 같다.(웃음)"

-'벌새'는 단편 '리코더 시험' 세계관과 이어진다. 첫 장편을 전작과 연결 지은 이유는.

"단편치고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끝나고 많은 분들이 '아홉살짜리 은희가 어떻게 자랐을지 궁금하다'라고 하더라. 그 물음이 좋았다. 캐릭터를 살아있는 느낌으로 받아들여 준 것 같았다. 그래서 '단편의 확장된 얘기를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더라. 사실 처음엔 엄청 막막했는데 한 달 반 만에 초고가 나왔다. 다만 수정 작업이 오래 걸렸다. 많은 스토리 라인과 캐릭터들을 미세하게 연결 지어야 해서 직조하는 과정이 어려웠다."

▲ 영화 '벌새' 스틸. 제공|엣나인필름

-은희의 처한 상황은 익숙한데 대응 방식은 신선하다. 그리고 이 모든 각각의 서사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기술적으로 많이 신경썼을 텐데.

"시나리오를 정말 많이 수정했다. 정말 많이 했다. 대사를 하나 하나 여러번 읽어보면서 별로인 것들을 고치고 잘랐다. 수학적으로 직조하는 과정도 있었다. 이 영화를 보고 '자연스럽다' '물 흐르듯 하다'라고 평가하면서 '자전적이냐'라고 물어보기도 하는데 그러기엔 큰 작업 공정이 있었다. 굉장히 많은 데이터베이스를 쌓고 모니터링했다. 언제 캐릭터를 퇴장시킬지, 언제 성수대교 사건 등 새 스토리를 시작할지 디테일하게 조정했다. 무수한 선택들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중점을 둔 기준은.

"'보편성'과 '전형성'은 다르다. 극 중 상황과 사건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전형적일 수 있다. 이걸 나만의 구체적인 걸로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예를 들어 '서울대를 가야 한다'고 연설하는 선생님들을 학창시절 많이 봤지만, 구호처럼 외치는 사람은 안 본 것 같지 않나. 대사를 두고 많이 생각했다. 은희가 키스한 뒤에 침을 뱉고 하는 대사들은 귀엽지 않나. 그만큼 디테일에 신경썼다.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원형적 사건과 상황을 그동안 보이지 않은 방식으로 어떻게 재현할지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최대한 구체적으로, 작가주의적 성격을 띨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런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가져왔나.

"일상을 많이 관찰했다. 물론 내가 캐릭터의 부분이기도 했다. 유리(설혜인)처럼 내가 누군가에게 마음이 확 돌변해 못 되게 군 적 있고 유리 같은 아이를 실제 내 삶에서 만난 적도 있다. 내 안에도 아빠(정인기) 같은 마초성, 가부장적 모습도 있다. 이런 걸 녹여냈다. 내 기억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서도 가져왔다. 

예를 들어 오프닝에서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 있지 않나. 처음엔 '집을 잘못 찾아간다'는 것만 생각하고 '말이 되는 건가' 싶었는데 오빠 친구가 군대 휴가를 나왔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었더라. 현관문 초인종을 누른 후에 갑자기 집안에서 강아지 소리가 들렸는데 대부분은 부모님이 강아지를 분양 받았다거나 집에 강아지 키우는 손님이 방문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나. 그런데 그 오빠는 '가족이 나를 버리고 이사갔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 하더라. 하지만 그 강아지는 오빠가 군대 간 동안 어머니가 반려동물을 들여온 거였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흥미로웠다. '누군가는 초인종을 눌렀을 때 거절당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라고 느꼈다. 그런 원형적인 공포가 있다. 상대방이 내게 응답이 없을 때 느끼는 두려움 등 미세한 감정선을 포착했다. 이렇게 미세한 걸 극대화하거나, 극대화된 걸 담담하게 표현하려 했다."

-스스로의 감정과 경험에 더 기대게 되지 않나. 그래서 주연이 여성인 건가 싶었다. 

"구체적 이유는 없다. 다만 내가 여성이니까 주인공이 동성인 게 자연스럽다. 지금까지 단편 네 개, 장편 한 개를 만들었는데 남자 주인공은 없다. 그냥 이게 자연스러웠다. 물론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지금 마음은 계속 여자 주인공일 것 같다."

-여성 감독이 만든, 그리고 여성 주연의 영화를 무조건 '여성 영화'라는 범주에 넣는 건 조심스럽다. 하지만 '벌새'에서 분명 은희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부당한 일들을 겪는다. 의도한 건가.

"은희의 일상을 들여다보려 했다. 배경이 90년대이지 않나. 공기 같은 일상을 그리는 게 목표였다. 모든 캐릭터가 신문에 날 만한 사람들도 아니고, 지나친 폭력도 없다. 폭력을 묘사하기 위한 영화를 원래 싫어한다. 은희가 일상을 살아가고, 그 시대의 보편적 모습을 비춤으로써 비정상성을 들여다보는 게 좋았다. 벌새처럼 그런 상황에서 관계를 맺어가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발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은희에게 폭력을 썼던 오빠 대훈(손상연)이 나중에는 고개를 숙인 채 운다. 영화는 그런 오빠를 뒷모습으로 보여주는데.

"가부장적 시스템에서는 어느 누구도 승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은희를 괴롭히지만 한편으로 오빠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괴롭혔을까. 나는 모든 캐릭터를 사랑했기 때문에 오빠의 마음을 들여다보려 했다. 물론 영지(김새벽)를 빌려 하는 말처럼 오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캐릭터도 소외당하지 않고, 악마로 보이지 않길 바랐다."

▲ 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 제공|엣나인필름

-왜 은희는 중학교 2학년일까.

"본격적으로 사회를 받아들이는 시기이지 않나. 초등학생 때만 하더라도 노골적으로 '서울대 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데 중학생이 되면 '당장 내일 모레 고3이 되고 서울대에 합격해 좋은 직장에 가야 한다'는 얘기를 서슴지 않게 하더라. 중학교 2학년부터는 이 시대의 질서를 배워가는 시기인 것 같다. 그만큼 비정상적인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언제부턴가 사회에서는 '중2병'이라고 희화화하는데 왜 그런걸까 궁금했다. 세련되고 교묘하게 숨길 수 있어도 어른들은 그때 당시에 느낀 좌절 같은 감정을 여전히 겪는다. 여전히 아프고 성장이 지연된 것 같은 허망함, 외로움을 느끼면서 미해결된 감정을 품고 사는데 왜 그들을 '중2병'이라고 희화하는 건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벌새'를 통해 그 유년 시절의 자신을 만나고, 그 때의 나를 애도하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싶었다. 인지도 있는 20대 배우를 캐스팅해 고등학생으로 설정하라는 말도 들었지만 중학생이어야 했다, 작은 몸짓을 가진."

-영화를 보는 내내 켜켜이 쌓인 감정을 들여다보는 게 개인적으로 힘들더라. 겁이 나는 느낌이랄까. 영화가 무섭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렇게 느끼는 것도 좋다. 이 영화를 만들 때 굉장히 서늘하지만 따뜻한 작품이길 바랐다. '불안하지만 따뜻하다'는 평이 있었는데 굉장히 잘 표현됐다고 생각했다. '차갑다'는 수식어보다 '서늘한' 느낌이 있었으면 했다. 미장센도 그렇게 했다."

-그래서 짙은 파란색인 새벽 배경으로 영화를 끝내는 게 치밀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그렇다. 집착의 끝이었다. 집착이 많았다."

-은희는 왜 이름이 '은희'인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만화의 작가 이름이 김은희였다. 은희라는 발음이 예쁘다. 오래된 이름처럼 취급 받을 수 있지만 되게 예쁘지 않나. 은희라는 이름이 참 좋다. 나르시시즘이 강했다면 '보라'라고 했을 텐데.(웃음) 은희라는 이름이 정말 좋아서 다음 작품에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똑같은 이름을 쓸 것 같다."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가져왔다. 
 
"그 시간은 88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사회가 맹목적으로 성장을 향해 달려가던 것에 제동을 건 첫 사건이었다. 성장하고자 했던 우리의 열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부실공사 때문에 벌어진 인재에 의한 사고였지 않나.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각성할 수 있게 해주는,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한 사건이라 생각한다."

-은희의 심리를 중심으로 '개인-보편' 이야기를 그리다가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연결 짓는다.

"성수대교가 동강 잘라져버린 이미지를 어렸을 때 봤는데 충격이었다. '벌새'를 준비하면서 당시 사건에 대해 다시 찾아봤고 그 이미지를 보면서 물리적 통증 같은 걸 느꼈다. 몇 십 년이 지나도 아직까지 철렁하더라. '이게 공동의 트라우마구나'라고 느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도 그렇다. 영화에서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다루기 전 은희와 사회의 균열을 연결 지었다. 그리고 그 사건의 물리적 붕괴와 은희의 심리적 붕괴의 연결 구조를 생각했다. 은희 내면의 단절, 가족 안의 단절, 사회의 단절 이미지를 생각했다. 한국사회 역사와 개인의 일상을 연결해 조망하고 싶었고 이들이 촘촘히 주고 받을 수 있게 그리는지가 중요했다."

-은희는 앞으로도, 그대로 씩씩할 것 같더라. 하지만 영화에서 펼쳐지는 사회의 미래는 다소 비관적인데.

"은희의 성장통 영화이자, 사회의 성장통 이야기이기도 하다. 성장-성장통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지 않나. '국뽕' 같은 국가주의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한국 사회가 열심히 살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과정에 얼마나 아픔과 부작용이 있었는지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 영지의 질문처럼 어떻게 살아가는 게 맞는지 들여다보는 거다. 영화에서 내가 사회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유지했던 건 그만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즉 애증이었다. 자신의 나라를 비판하지 않으면 진실되게 사랑하지 않는 거라 생각한다. 또 나는 사회와 개인은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은희의 미래가 희망적일 거라 여길 수 있지만 언제 또 고꾸라질지 모른다."

-은희의 구원 같은 존재를 삶에서 빼앗아간다. 물론 역설적으로 은희의 단단함을 보여주려 한 의도는 알겠지만, 가혹하더라.

"그렇다. 원망하는 분들도 있더라.(웃음)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그 다음부터 IMF 사건이 터진다. 이런 일들이 일련적으로 일어나기 전부터 사회는 균열을 겪고 있었다. 그런 균열이 개인 일상에 침투하는 게 흥미로웠다. 영화를 1,2,3막으로 나눴을 때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건 3막에 배치했다. 앞의 1,2막에서는 은희의 일상, 그리고 내면의 붕괴가 일어나면서 뭔가가 후두둑 떨어진다. 잔인하지만 은희를 몰아부쳐야했다. 그리고 (은희를 감싸고 있는 세계가) 다 떨어졌을 때 전차가 지나가듯 빠른 흐름으로 그 뒤의 이야기가 흘러가게 만들었다. 1,2막에서는 촘촘하게 균열들이 일어나고 3막에서 그 균열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걸 그리고 싶었다."

-그런 흐름을 만들려면 편집 과정이 엄청 힘들었을 텐데.

"이렇게까지 작업을 해야 하나 생각이 들더라.(웃음) 10개월 가량 편집했다. 편집 감독님과 정말 고생했다. 신도 전환해보고 시퀀스도 여기 붙였다가 저기 붙였다가. 미칠 것 같았다. 그런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영화가 촘촘하게 나온 것 같아 다행이다."

-러닝타임 3시간 30분 가편집본을 두 버전으로 줄이고, 결국 2시간 18분짜리가 개봉되는데.

"지금 개봉하는 러닝타임 버전과 2시간 44분짜리 버전이 있었는데 고민하다가 2시간 18분으로 선택했다. 울면서 잘라냈다.(웃음) 시나리오 무삭제 책에도 들어가겠지만 이 영화가 엄청 거대한 사건을 다루는 게 아니라서 가족들, 친구들, 연인 관계 이야기들 에피소드와 디테일을 잘라냈다. 이 작업을 하느라 내 인생에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다. 많은 사랑을 받아 지금 버전이 운명인 것 같다. 나중엔 감독판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다시 볼 마음이 준비 안 됐다.(웃음)"

▲ 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 제공|엣나인필름

-은희처럼 단단한 사람 같다.

"아니다. 말만 그렇게 하는 거다. 부산국제영화제 프리미어 때 미쳐갔다. 연출부들이 정말 고생했다. 진짜 고생했다. 고생한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선물 같은 영화가 될 수 있어 다행이다. 모두가 보람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런 게 너무 감사하다."

-단편과 장편은 다르지 않나. 첫 장편 작업을 하면서 느낀 소회도 남다를텐데.

"장거리를 갑자기 뛰게 돼서 적응을 못했다. 체력 관리도 제대로 안 하고 마라톤을 뛰게 된 선수 같았다. 정말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더라.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두번째 영화는 좀 더 쉽게 찍고 싶다. 이번에 하면서 아쉽고 못했던 것들을 두번째 영화에서 하고 싶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벌새'를 틀었을 때 어떤 분이 사인을 요청했는데 갑자기 '저 '벌새' CG 한 사람이에요'라고 말하시더라. 너무 놀랐고 'CG 대박이에요'라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우리 예산에서 나올 수 없는 그런 퀄리티였다. '이 영화는 많은 사람들의 손길로 만들어졌구나'라고 더 실감한 순간이었다. 너무 기쁘고 고마웠다."

-나중에도 이렇게 강도 높은 작업을 할 것 같은데.(웃음)

"안 된다.(웃음) 그때는 예산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 '벌새' 작업하면서 5만원에도 벌벌 떨고 도시락 한 개 남는 것도 아까웠다. 돈을 못 썼다. 연출부도 마찬가지였다. 조감독이 콘티 복사하는 것도 비싸게 하면 안 된다고 제본하는 가격을 가게마다 다 비교했다. 시간 없고 피곤할 텐데 그렇게 하고 있더라. 속상했다. 또 그 친구들이 야근하는데 감독님이 힘들게 모은 돈(제작비)이라고 자신들 돈으로 저녁이나 간식을 사먹더라. '카드 줬는데 왜 돈을 안 쓰냐'고 말했는데도 그러더라. 정말 눈물 났다. 그때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

-그런데도 영화를 왜 하나.

"모르겠다. 전생에 큰 죄를 짓지 않았을까.(웃음) 엄청난 성취감이 있다. 내 세계를 통해 타인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대화할 수 있는 건, 인생에서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영화로 위로 받았다. 영화는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굉장히 매력적인 도구이지 않나. 사람의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사람들과 함께 여행할 수 있다는 게 영화를 만드는 가장 큰 동력이다. 그리고 내 과거와 지금 사람들의 현재가 만날 수 있고, 때로는 서로가 치유 받을 수 있는 게 좋다."

-'벌새'는 어떤 작품이었나.

"내게 영화라기보다 시대를 돌아보는 작업이었다. 내 삶과 내가 하는 일이 일치되는 순간들이었다. 24시간 '벌새'를 생각했다. 그냥 사랑했던 것 같다. 물론 너무 사랑해서 집착이 커졌지만 내가 이렇게 애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없었던 것 같다. 내 삶의 에너지를 이렇게 많이 썼던 게 처음이었다. 내 삶을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개봉하기 전에도 뭔가 큰 선물을 받았다. 가족들을 더 사랑하게 됐고 내 주변 사람들과 더 이야기를 나누게 됐고, 나를 알게 됐다. 하나로 정리해서 말할 수 없지만 내 삶에서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위로 받았다."

-치유가 된 건가.

"'벌새'를 만들면서 예전에 내가 겪은 트라우마가 올라왔다. 이 영화는 대학원 시절 꿨던 중학교 꿈에서 시작됐다. 촬영 이틀 후에 다시 꾼 꿈에서는 내가 동창회를 갔는데 사람들이, 아이들이 나를 따뜻하게 환대해주더라. 해석이 필요 없는, 굉장히 심플한 꿈이었다. '벌새' 작업을 끝내고 이틀 정도 잠만 잤는데 그 꿈을 다시 꿨을 때 내 인생에서 하나의 챕터가 떨어져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되게 상징적인 엔딩 같더라. 미해결된 과제들이 봉합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내가 잘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후반 작업을 하면서 다시 은희 모드가 돼 미쳐가긴 했지만(웃음), 지금 개봉을 앞두고서는 덤덤하다. 잘 '안녕'하고 있다."

-잘 '안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속편을 바라는 사람이 많다.

"안 된다. (웃음) 모르겠다.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 영화 '벌새' 포스터.

'벌새'는 29일 개봉한다.

스포티비뉴스=유지희 기자 tree@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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