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이 2018년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조별 리그 A조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였던 말레이시아전에서 2-0으로 완승했다. 승리에 환호하는 베트남 팬들이 태극기 베트남기와 함께 호치민 사진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하노이=한희재 기자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스포티비뉴스 조형애 기자가 18일 하노이에서 보내온 [하노이 NOW] 세상에서 제일 쉬운 '박항서 찾기' 제하 기사에서 한 장의 사진이 글쓴이 눈길을 붙잡았다.

'이게 실화인가‘ 싶을 정도로 믿기 어려운 장면이 사진에 담겨 있었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는데 최근 베트남에 불고 있는 ’박항서 열풍‘을 떠올려 보니 그럴 만도 하다고 느꼈다.

스포티비뉴스 한희재 기자가 찍은 이 사진에는 태극기와 베트남기가 하나의 깃대에 사이좋게 걸려 있고 그 옆에는 일본~프랑스를 거쳐 미국에 이르기까지 강대국과 펼친 독립 그리고 통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호 아저씨’ 호치민 사진이 실려 있었다.

40여년 전만 해도 총부리를 겨눴던 적장(敵將) 사진이 태극기 옆에 있다니. 태극기가 이상하게 그려져 있긴 하지만 그런 걸 문제 삼을 축구 팬은 없으리라. 스포츠의 힘은 이렇게 위대하고 그 일을 ‘한국인 박항서 감독’이 해낸 것이다.

대한뉴스에서 보여 주는 승전보 같은, 중·장년 한국인이 갖고 있는 월남전에 대한 기억들 외에 글쓴이는 두어 가지 기억이 더 있다.

글쓴이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 한국군이 월남전에 뛰어든 지 2, 3년쯤 지나고 있었고 전투 병력이 본격적으로 가고 있었다. 이때 글쓴이는 친구들과 함께 부산항 제3 부두에서 미 해군 수송선을 타고 월남(통일 전 남베트남)으로 가는 청룡·맹호·백마 부대 군인들을 환송했다. 무사 귀환하는 군인들을 환영하러 가기도 했다. 현장에서 본 여러 가슴 아픈 사연은 생략한다.

파병 군인들 가운데에는 글쓴이 삼촌도 있었다. 맹호부대로 월남에 갔다 돌아온 삼촌은 글쓴이에게 ‘파커 만년필’을 선물로 줬다. 학생으로서는 쉽게 만질 수 없는 필기구에는 장조카가 그 만년필로 공부 열심히 하기 바랐을 삼촌의 마음이 담겨 있었을 터이다. 글쓴이는 파커 만년필로 알파벳 필기체와 인쇄체 대문자 소문자를 익혔고 10여년 뒤 스포츠 기자 꿈을 이뤘다.      

초등학교 때부터 스포츠를 좋아했던 글쓴이의 월남에 대한 기억은 이후 스포츠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1949년 대한축구협회는 대표 팀을 꾸려 동남아시아 원정에 나섰다. 한국전쟁 전 일이다. 1차 원정지인 홍콩에서 2승2패를 기록한 대표 팀은 1월 15일 사이공(오늘날 호치민)에서 가진 월남과 첫 경기에서 4-2로 이겼다.

이 무렵 월남의 수도인 사이공 시내는 총소리가 들리는 등 어수선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와중이었기 때문이다. 대표 팀은 2차전에서 3-3 무승부를 기록했고 3차전에서 월남 주둔 프랑스군과 경기를 치러 5-0으로 이겼다.

1960~70년대만 해도 한국은 동남아시아 지역 친선 축구 대회인 메르데카배(말레이시아) 킹스컵(태국) 등에서 월남과 자주 만났다. 경기는 라디오 또는 TV로 중계됐다. 그런데 그 시절 특별히 기억 나는 한국-월남 경기는 축구가 아닌, 여자 농구다.

1970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월남을 98-8로 꺾었다. 우승국 일본이 인도를 152-28로 누르는 등 각 나라의 경기력 차이가 큰 시절이었지만 대회 45경기에서 10득점 이하로 묶인 건 월남이 유일했다.

요즘은 국내 매체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 동남아시아경기대회(Southeast Asian Games)란 게 있다. 지역 국제 종합 경기 대회인데 1959년 태국 방콕에서 제1회 대회가 열린 이래로 월남은 오랜 기간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통일 베트남은 하노이와 호치민에서 분산해 주최한 2003년 대회에서 처음으로 종합 1위를 차지했다. 베트남은 2005년과 2007년 대회 3위, 2009년 대회 2위, 2011년 대회부터 직전 대회인 2017년 대회까지 4회 연속 3위를 기록하며 기존 강호였던 인도네시아 태국과 함께 대회 3강을 형성하고 있다. 통일의 힘이 스포츠 분야에도 미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월남은 작은 규모지만 1952년 헬싱키 대회부터 1972년 뮌헨 대회까지 올림픽에 연속 출전했다. 월맹(통일 전 북베트남)은 이 기간 올림픽에 한 차례도 출전하지 않았다. 하노이와 하이퐁 등지에 대한 북폭(北爆)이 일상인 나라 형편이었으니 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쪽 대회였던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통일 베트남은 육상과 수영에 출전했다. 마라톤의 꾸엔 능우옌은 2시간44분37초로 53명의 완주자 가운데 50위에 그쳤다. 멀리뛰기에선 능우옌 티 호앙 나가 5m35의 저조한 기록으로 19명의 출전자 가운데 꼴찌에 머물렀다. 금메달을 목에 건 러시아의 타티아나 콜파코바와의 기록 차는 무려 1m71cm였다.

베트남은 역시 반쪽 대회였던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출전하지 않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육상, 수영, 복싱 등에 10명의 선수를 내보냈는데 마라톤에 출전한 트예 능우옌이 3시간10분57초 만에 결승점을 통과했다. 98명의 완주자 가운데 97위였다.

이후에도 올림픽에 계속 출전한 베트남은 2000년 시드니 대회에서 태권도 여자 57kg급 트란 히우 능안이 자국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인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뤘다. 한국군은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 때 남베트남 지역에 주둔해 태권도를 전파했다. 베트남은 2008년 베이징 대회 역도 남자 56kg급에서 호앙 안 투안이 은메달을 들어 올려 자국 사상 두 번째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었다.

베트남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사격 남자 권총 50m에서 호앙 수안 빈이 4위, 역도 남자 56kg급에서 트란 르 꾸오 트안이 4위를 차지하는 등 선전했다. 빈은 본선에서 563점으로 한국의 진종오(562점)보다 한 단계 높은 4위로 결선에 오르기도 했다. 트안은 용상에선 2위였으나 인상에서 6위로 처져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그러나 여러 종목에서 경기력 향상이 눈에 띄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에서 베트남은 남자 10m 공기권총에서 호앙 수안 빈이 자국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는 기쁨을 누렸다. 호앙 수안 빈은 남자 50m 권총에서 은메달을 추가했다. 금메달이 포함된 종합 순위 공동 48위의 뜻깊은 성적표를 받았다. 베트남 아래로 메달을 딴 나라만 대만(금 1)을 비롯해 35개 나라가 있었고 이 가운데에는 지역 라이벌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필리핀이 들어 있었다. SEA 게임 경쟁국인 태국(금 2 은 2 동 2)과 인도네시아(금 1 은 2)에 근접하는 성적을 올렸다.

통일 이후 발전하는 베트남 스포츠에, 축구로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박항서 감독이기에 [하노이 NOW] 세상에서 제일 쉬운 '박항서 찾기' 같은 기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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