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주영(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유치위원장이 치열한 한일 스포츠 외교전이 펼쳐진 바덴바덴에서 유치단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대한체육회 90년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한동안 설왕설래했던 올림픽 유치 분위기는 전두환 대통령의 강력한 유치 의지에 따라 반전되고 체육계 움직임도 부산해졌다. KOC는 1981년 7월 11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열린 범미주올림픽위원회 총회에 전상진 부위원장을 옵저버 자격으로 파견해 서울의 올림픽 유치 의지를 처음으로 국제 회의 자리에서 밝혔다.

직업 외교관 출신인 전상진 부위원장은 카라카스 총회에서 12명의 IOC위원들과 접촉해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고 특히 ANOC 회장이며 범미주올림픽연합회 의장인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멕시코)와 면담에서 20일 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있을 ANOC 총회 때 한국의 올림픽 유치에 관한 제안 연설을 일본과 같이 10분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선물을 받는 성과를 얻었다.

한국이 카라카스 총회에 나타나 유치 활동을 펼치고 있었는데도 일본은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한국으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카라카스 범미주올림픽총회에 뒤이어 1981년 7월 21일에는 김운용 세계태권도연맹 총재가 북중미 및 유럽을 순방하며 현지에서 활약하고 있는 태권도 사범들을 앞세워 13명의 IOC 위원들과 만남을 갖고 서울의 올림픽 유치를 호소했다.

이때까지 접촉한 대부분의 IOC 위원들은 한국이 유치 신청만 해 놓고 실제로 유치 의사가 없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한국의 보다 더 적극적인 유치 활동을 요구 문받기도 했다.

조상호 KOC 위원장은 1981년 7월 21일 자로 각국 NOC 위원장에게 제24회 여름철 올림픽의 서울 유치에 협조해 달라는 공문을 발송한 데 이어 7월 28일에는 인도, 파나마 등 15명의 IOC 위원들에게 방한 초청장을 보냈다. 뒤를 이어 조상호 위원장은 7월 30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ANOC 총회에 달려가 서울시의 올림픽 유치를 강력히 호소하는 제안 연설을 감동 깊게 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날 회의에는 사마란치 IOC 위원장을 비롯해 15명의 IOC 위원들과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 ANOC 회장 등 세계 스포츠계를 움직이고 있는 거물급 인사들이 참석해 KOC가 이들 앞에서 제안 연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날 회의에서 한국에 앞서 제안 연설을 한 일본 대표는 서툰 영어로 충분한 준비 없이 불과 2, 3분 동안 의례적인 나고야 지지 연설을 한데 반해 조상호 위원장은 유창한 영어로 상세하고 설득력 있는 연설을 해 한국의 올림픽 유치 의지를 깊게 심어 주었다.

뒤늦게 불붙은 한국의 올림픽 유치 활동에는 외무부도 한몫했다. 외무부는 1981년 5월 25일 IOC 위원이 있는 국가의 상주 공관에 훈령을 내리고 IOC 위원들의 동향을 수시로 보고하고 IOC 위원들과 접촉에 만전을 기하도록 했다. 공관원들의 적극적인 외교 노력으로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고 한국의 올림픽 유치 의지를 의심했던 IOC 위원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도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났다. 이들 재외공관의 노력도 처음부터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본국의 강력한 드라이브로 체육인들이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을 대신했다.

주무 부처인 문교부는 체육계와 외무부가 펼친 유치 활동의 중간 성과를 점검한 결과 접촉한 IOC 위원은 60명이었고 그 가운데 적극 지지를 표명한 5명을 비롯해 지원 약속 16명, 호의적 고려 16명, 중립 16명으로 분석했다. 한국이 접촉한 IOC 위원들의 대체적인 반응은 서울의 경기장 시설과 도시 환경은 나고야보다 훨씬 우수하나 많은 공산권 국가들과 국교가 없고 전쟁 위험 등 선수단 안전에 문제가 있으며 유치 활동의 시작이 너무 늦었다는 것이었다.

나고야는 기요카와 마사지 IOC 부위원장이 수년간 올림픽 유치 정지 작업을 펼친 데다가 1979년 9월부터 1981년 5월 사이 전 세계 IOC 위원들과 국제 스포츠계 지도자들을 초청하거나 방문하는 등 득표 기반을 단단히 구축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역적으로 살펴보면 미주와 대양주 IOC 위원들은 서울에 비교적 호의적이었으나 공산권과 유럽, 서아시아는 나고야로 기울어져 있었고 아프리카와 남미는 분명한 태도를 유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한국이 뒤늦게 유치 활동에 뛰어든 것을 고려하면 IOC 위원들의 반응은 예상을 뛰어넘어 좋은 것으로 평가됐고 21명의 IOC 위원들이 서울 지지를 표명해 나고야와 표 대결에서 체면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적인 결론을 내린다.

문교부는 이 같은 중간 점검을 바탕으로 IOC 위원들에 대한 지속적인 접촉과 1981년 9월 바덴바덴 IOC 총회까지 집중적인 활동을 펼친다면 백중지세로 성공 가능한 득표도 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중간 점검 결과에 용기를 얻은 이규호 문교부 장관이 1981년 8월 10일 열린 정부의 제4차 올림픽 유치 대책 회의에서 고무적인 전망을 내놓자 남덕우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료들은 모처럼 밝은 얼굴을 보이면서 격려했다고 한다.

올림픽 유치에 가장 부정적인 자세를 보였던 경제 각료들의 태도가 부드러워져 특별 대책반 구성과 홍보 전시관 설치, 홍보 영화와 책자 제작 등 바덴바덴 총회에 전력투구하는 데 의견을 모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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