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아퐁 푸에온은 K리그 초창기 우수 외국인 선수 가운데 한 명으로 태국 축구의 영웅이다.ⓒ 연합뉴스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문재인 정부의 주요 경제 정책 가운데 하나인 ‘신남방정책’이 가시화되면서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나라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이 지역 나라들과 한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다. <편집자 주>

태국의 수도 방콕은 1966년과 1970년, 1978년, 1998년 등 4차례나 아시아경기대회를 개최했다. 1986년(서울)과 2002년(부산), 2014년(인천) 대회를 연 한국보다 아시안게임을 많이 치렀다. 네 차례 아시안게임 가운데 1970년 제6회 대회는 한국(서울)과 특별한 사연이 있다.

그리고 태국이라고 하면 중·장년 축구 팬들은 K리그 초창기 우수 외국인 선수 가운데 한 명인 피아퐁을 떠올릴 것이다. 피아퐁은 1984년 8월 럭키금성 황소(FC 서울 전신)에 입단해 1985년 시즌 럭키금성의 첫 번째 K리그 우승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해 K리그에서 득점상과 도움상을 처음으로 함께 받은 선수가 되며 전성기를 보냈다. 피아퐁은 한국에 오기 전 현역 군인(상사)으로 태국 공군 팀에서 뛰고 있었다.

서울이 개최를 포기한 아시안게임을 방콕이 대신 연 사연을 살펴본다.

1966년 제5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기간 한국은 1970년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 유치에 성공했다. 그러나 대회 유치 과정에서 예산이 방콕 대회의 6분의 1 수준으로 책정되는가 하면 정부도 유치와 유치 포기 등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보여 불안감이 감돌았다. 이듬해인 1967년 3월 KOC(대한올림픽위원회)는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의 서울 개최권을 반납한다는 내용을 AGF[아시아경기연맹,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 전신] 회원국과 AGF 집행 위원들에게 통보했다.

경제 개발에 국력을 쏟아 붓고 있던 때여서 대회 반납은 옳은 결정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흔치 않은 사례인 데다 한국 대신 대회를 개최할 나라를 찾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한국은 대체 개최국으로 일본을 꼽고 접촉했으나 1972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을 유치해 놓은 일본은 난색을 보였다. 한국은 태국으로 방향을 바꿔 태국올림픽위원회 승낙을 받아 반납 의사를 밝힌 지 1년 여 만인 1968년 5월 서울에서 열린 AGF 긴급 특별 총회에서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대회 반납 절차를 마쳤다. 태국에는 25만 달러의 적자 보전금을 지불했다. 느닷없이 대회를 인수 받은 방콕은 2회 연속 아시안게임을 치렀고 이후 아시아경기대회 단골 개최지가 됐다.

한국과 태국이 스포츠 분야에서 대규모로 만난 건 1966년 아시아경기대회에서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주최국 태국을 간발의 차이로 따돌리고 대회 출전 사상 처음으로 일본에 이어 종합 순위 2위에 올랐다.

이 대회에서 탁구는 뜻밖의 대어를 낚았다. 아직 중국이 아시아 스포츠 무대에 얼굴을 내밀기 전 탁구는 일본의 독무대였다. 그런데 남자 단식에서 김충용이 금메달을 차지한 것을 비롯해 은메달 3개, 동메달 5개로 한국이 종합 2위를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당시 일본은 세계적인 탁구 강국이었다. 김충용은 금메달 숫자에서 태국에 11-12로 뒤져 있는 가운데 극적으로 금메달을 한국 선수단에 안겼다. 한국은 개최국 태국과 금메달은 12개로 같았으나 은메달에서 18-14, 동메달에서 21-11로 앞섰다. 마지막 순간에 종합 2위를 탁구 때문에 한국에 넘겨 준 태국은 얼마나 화가 났던지 한국에서 떠안은 1970년 제7회 대회 때 탁구를 정식 종목에서 뺐다는 뒷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단체 구기 종목은 대체로 부진했다. 축구는 조별 리그에서 태국에 0-3, 버마(오늘날의 미얀마)에 0-1로 져 탈락했다. 신세대 축구 팬들은 이 대회 32년 뒤인 1998년 다시 방콕에서 열린 제13회 대회 8강전에서 2명이 퇴장당한 태국에 연장 접전 끝에 1-2로 진 경기가 기억날 것이다. 태국은 이후 준결승에서 준우승국 쿠웨이트에, 3위 결정전에서 중국에 각각 0-3으로 져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과 태국은 축구에서 거칠게 맞붙곤 했는데 정작 더 큰 충돌은 농구에서 벌어졌다. 1966년 아시안게임에서 농구 준결승에서 한국은 태국과 맞붙었는데 선수들끼리 시비가 붙자 일부 관중은 물론 경찰까지 가세한 난투극에 휘말리는 불상사 끝에 경기 중단 당시 스코어로 승패를 가려 52-67로 져 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3위 결정전에서 일본을 72-60으로 꺾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1970년 또다시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은 제5회 대회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했다. 1970년대 한국 수영의 슈퍼스타 조오련과 ‘아시아의 마녀’로 불린 육상 포환던지기의 백옥자가 이 대회에서 아시아 정상에 올랐다. 조오련은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1974년 테헤란 대회까지 2연속 2관왕이 됐다.

1978년 제8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한국과 북한이 축구에서 공동 우승한 게 화제였다. 이 대회는 준비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이 대회는 파키스탄에서 열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파키스탄이 국내 사정을 들어 대회를 반납해 분담금과 이스라엘의 참가 여부 등 어려운 문제 속에 방콕이 다시 한번 대회 개최지로 결정됐다. 1970년 제6회 대회를 서울 대신 치른 적이 있는 방콕은 세 번째 아시아경기대회를 열게 됐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축구 종목에서 태국과 또다시 만났다. 한국은 조별 리그 C조에서 바레인을 5-1로 크게 이긴데 이어 쿠웨이트와 일본을 2-0, 3-1로 꺾고 조 1위로 준결승 리그에 올랐다. 한국은 중국과 말레이시아를 각각 1-0으로 물리친 여세를 몰아 태국을 3-1로 완파하고 조별 리그를 포함해 6전 전승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대회 마지막 날 맞붙은 한국과 북한은 전, 후반 90분을 득점 없이 비긴 뒤 연장전까지 치렀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1998년 네 번째로 방콕에서 열린 제13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앞서 언급한 대로 축구가 충격적인 탈락을 했지만 이봉주가 마라톤에서 1994년 히로시마 대회 황영조에 이어 우승하는 등 금메달 65개와 은메달 46개, 동메달 53개를 획득해 일본(금 52 은 61 동 68)을 여유 있게 누르고 종합 순위 2위를 되찾았다. 히로시마 대회에서는 일본이 중국 수영 선수 5명이 도핑테스트에 걸려 박탈당한 금메달 5개를 승계하면서 한국을 제치고 종합 2위를 차지했다.

태국은 4차례나 아시안게임을 열다 보니 동남아시아 나라들 가운데에서 한국과 스포츠 교류가 가장 많았다. 축구의 경우 태국이 주최하는 킹스컵에 한국은 단골 초대 손님이었다.

태국은 1952년 헬싱키 대회 때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에 섰고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금메달 9개와 은메달 8개, 동메달 16개를 획득했다. 역도(여자)와 복싱이 강세 종목으로 이 종목에서 모든 올림픽 금메달이 나왔다.

태국은 한국전쟁 때 육·해·공군을 모두 파병했고 전쟁 발발 닷새 뒤인 1950년 6월 30일 쌀 4만t을 지원했다. 그라운드에서 코트에서 때로는 거칠게 맞붙기도 했지만 한국과 태국은 오랜 시간 스포츠 분야에서 우의를 이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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