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vs 브루나이 전반전 포진도 ⓒ김종래 디자이너


[스포티비뉴스=파주, 한준 기자] 전반전에 대량 득점이 나오면, 후반전에는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브루나이의 실력이 워낙 떨어지긴 했지만, 정정용 감독이 지휘한 대한민국 19세 이하(U-19) 대표 팀은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사력을 다해 경기했다. 호랑이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전심전력을 다한다는 말처럼, 호랑이 마크를 달고 뛴 U-19 대표 팀은 2일 파주스타디움에서 치른 2018 AFC U-19 챔피언십 예선 F조 첫 경기에서 11-0 대승을 거뒀다.

골이 터질 때마다 환호와 기쁨이 있었지만, 경기 후 기자회견장에서 만난 정정용 감독, 믹스트존에서 마주친 U-19 대표 선수들은 하나 같이 아쉬움을 말했다. 11골이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정 감독은 그보다 경기 내용에서 드러난 아쉬움을 짚었다. 8골을 넣은 후반전보다 3골 밖에 넣지 못한 전반전. 일대일 싸움에서 힘의 차이로 대부분의 득점이 나온 전반전의 경기 패턴은 준비했던 밑그림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선수들이 원하는 만큼 골을 넣은 것에 대해 감사한데, 그보다 먼저, 우리가 준비한 부분에 대해서 전반적에 유기적 플레이가 잘 안 나왔다. 상대가 내려섰을 때 부족한 부분이 나왔다. 측면과 중앙의 전화 플레이가 잘 안됐다. 사실 4-4-2 포메이션을 쓰면서 측면을 이용한 것은 사실이다. 투 스트라이커의 움직임이 부족했다. 후반전 초반에 조영욱과 김찬의 콤비네이션이 이뤄졌는데, 내가 다시 주문한 것이다. 자꾸 측면으로만 가다 보니까, 준비한 것이 안 나왔다. 미드필드 라인의 템포가 느리다 보니 그렇게 진행됐다.”

▲ 정정용 감독 ⓒ한희재 기자


◆ 계획 있는 축구, 정정용호의 첫 공식 경기 복기

대한축구협회 전임지도자 출신으로 전술 이론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치밀한 감독으로 알려진 정 감독은 회견장에서 꼼꼼하게 경기를 복기했다. 상대 밀집 수비를 예상해 4-2-4 대형으로 측면과 높이를 활용했다. 하지만 이 단순한 플레이에 팀의 기조가 매몰되길 바라진 않았다. 전반전에 기대한 방식으로 골을 만들었지만, 플레이 방향성이 포메이션 대형에 잡아 먹혔다.

후반전에 정 감독은 세 장의 교체 카드를 썼는데, 첫 번째 카드는 수비수 고준희가 부상을 입어 불가피하게 썼지만, 후반 21분에는 미드필더 이강인과 정호진을 투입하며 전형을 4-3-3으로 바꿨다. 그 뒤로 중앙 지역에서의 플레이가 살아났고, 20여분간 5골이 쏟아져 나왔다. 

중앙을 파고들었지만 측면 자원이 골로 가는 과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가운데로 적극 진입했다. 왼족 윙어로 나선 임재혁이 1골 1도움, 오른쪽 윙어로 나선 이상준이 1골 3도움을 올리며 꽤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했다. 

정 감독은 애초 대회를 준비하면서 밀집 수비에 대응한 투톱, 빌드업 플레이를 중시한 4-3-3(4-1-4-1)을 함께 준비했다. 첫 경기에서 두 가지를 다 보여줬다. 연습 당시 보다 완성도가 높았다. 물론, 정 감독의 성에 차지는 않았다.

하프타임에 정 감독의 주문으로 후반 4분 임재혁의 커트인에 이은 중거리 슈팅, 후반 6분 이상준의 크로스 패스에 이은 조영욱의 헤더 득점, 후반 16분 김정민의 중앙 침투 패스에 이은 조영욱의 문전 슈팅 득점은 전반전에 단순한 측면 공격을 통해 따낸 세 골 보다 과정의 밀도가 높았다. 이강인 투입 이후 얻은 페널티킥을 비롯한 5골도 중앙 지역의 플레이를 집요하게 시도하며 얻어낸 골이다. 브루나이의 체력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전반전보다 경기력이 좋아졌다.

해트트릭을 달성한 조영욱도 정 감독의 생각과 같았다. “플레이에 미스가 있었고, 골을 더 넣을 수 있었는 데 못 넣어서 아쉽다”고 했다. 3골이나 넣었고, 대승을 해서 기쁘긴 하지만, 완벽한 플레이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다. 이런 열정은 한계를 뛰어 넘어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이미 지난 여름 FIFA U-20 월드컵을 경험한 조영욱에게 한 번 더 이 대회에 나서는 것은 자칫 ‘시시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16강 탈락은 그에게 8강 이상의 성과를 내고자 하는 또 다른 동기부여로 이어졌다.

▲ 후반전 포진도 ⓒ김종래 디자이너


◆ 주장 김정민과 월반 이강인, 정정용호를 특별하게 만들 중원 창조자

주장 완장을 찬 김정민에겐 또 다른 의미다. 김정민은 한국에서 열린 FIFA U-20 월드컵 최종 훈련 멤버에 들었으나 21명의 최종 엔트리에는 들지 못했다. 조영욱과 같은 나이. 한 번 더 대회를 치를 수 있는 막내. 이제는 U-19 대표 팀을 이끌어야 하는 주장 완장을 찼다. 막내에서 고참이 된 조영욱은 “형이 되니 편할 줄 알았는데, 부담이 되고 신경이 쓰인다. 막내가 편하다”며 웃었다. 지난 U-20 대표 팀에서 주역이 되지 못했던 김정민의 마음가짐은 다르다.

“전에는 형들을 따라가야 하고 뒤에서 받쳐줘야 했다. 이제는 앞서서 해야 한다. 내가 솔선수범해야 한다.” 훨씬 의젓한 모습을 보인 김정민은 어려서부터 ‘리틀 기성용’이라 불렸고, 기영옥 단장이 이끄는 광주FC 유스 금호고에 입학했다. 본래 전후진을 자주하던 김정민은 이날 한층 더 기성용에 가까운 빌드업 미드필더의 모습을 보였다. 김정민은 “기성용 선수와 비교되어 영광”이라고 하면서도 “기성용 선수 보다 뛰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자신감도 보였다.

브루나이전에 김정민은 두 센터백 앞에서 공을 쥐고 전방와 좌우 측면으로 공을 찔러 주며 배급했다. 직접 공격 포인트를 올리진 못했으나 전반 17분 김찬의 슈팅 과정에서 결정적인 로빙 패스를 보냈고, 후반 16분 조영욱의 문전 돌파에 이은 슈팅도 김정민의 침투 패스가 기점이었다. 김정민이 빌드업의 기점 역할을 했다.

▲ 김정민 ⓒ한희재 기자


사실 브루나이전에 정 감독은 주력 선수를 상당수 쉬게 했다. 이틀 간격으로 열리는 예선전에서, 브루나이가 최약체다. 4일 인도네시아, 6일 동티모르, 8일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강호다. 동티모르는 신흥강호다. 정 감독이 U-20 월드컵 출신 선수들을 중심으로 구성해 임시 감독으로 나섰던 지난 7월 AFC U-23 챔피언신 예선전에서, 한국은 동티모르와 비기며 본선 진출 실패 위기에 직면했다. 베트남에 2-1 신승을 거둬 간신히 본선에 올랐다.

정 감독은 회견장에서 자신의 전술적 지론과 팀 운영 방안을 설명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날은 “동티모르에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에…”라는 말을 세 차례 정도 언급하며 쓴 웃음을 지으며 전술 전략에 대한 이야기는 숨기고 싶다고 했다. 인도네시아는 이번 예선전에 국민적 관심이 높고, 동티모르는 악몽을 안긴 주인공이며, 말레이시아도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을 갖춘 팀이다. 

오세훈(울산현대 유스), 전세진(수원삼성 유스), 정우영(바이에른뮌헨 유스), 이강인(발렌시아 유스) 등 선수들이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정 감독이 애써 숨기려 하지만 지난 연습 경기와 훈련 과정을 통해 U-19 대표 팀의 주전 윤곽은 어느 정도 드러난 상황. 브루나이전 선발 출전 선수 중 플랜A에 해당하는 선수는 스트라이커 조영욱, 미드필더 김정민, 골키퍼 이광연 정도 뿐이었다. 후반전에 이강인이 김정민 대신 들어갔고, 정호진은 조영욱 대신 들어가 플랜A의 윤곽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전형 변화 이후 정 감독이 그리는 플랜A 밑그림은 어느 정도 나왔다. 

가장 주목 받은 선수는 역시 한국의 메시로 불리는 이강인. 발렌시아 유스로, 레알마드리드 유소년 팀의 영입 제안을 받았고, 협상이 진행됐으며, 최종적으로 발렌시아가 월반 조건을 제시해 잔류한 사실이 스페인 전역에 알려진 기대주다. 이강인은 만 16세의 나이지만 발렌시아 18세 이하 팀에서 주전 선수로 뛰고 있고, 내년에는 프로에 해당하는 2군 승격을 보장 받았다. 한국 U-19 대표 팀에서도 두 살 어린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안정된 경기를 했다.

이강인은 섬세한 볼 컨트롤, 몸을 이용한 지능적인 볼 관리, 왼발을 통한 창조적인 패스, 예리한 슈팅 등을 구사하며 짧은 시간 시선을 사로 잡았다. 문전에서 골 사냥에 주력하는 선수가 아니라 중원에서 빌드업을 주도하는 플레이메이커. 이강인은 소속팀에서는 물론, U-19 대표팀에서도 피지컬 코치가 팀 훈련 이외 시간에 별도의 피지컬 강화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신경 써서 키우고 있다. 이강인은 불과 몇 개월 전보다 신체적으로 더 단단해진 모습을 보였다. 

▲ 이강인 ⓒ한희재 기자


자신감도 있었다. 후반 27분 김찬이 페널티킥을 얻자 먼저 다가가 자신이 차도 되는 지 물었다. 지난 소집 당시 연습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했던 이강인은 확실하게 차 넣으며 골 세리머니를 했다. 평소 성격이 조용하고, 경기 중에도 차분하지만 골과 승리에 대한 의욕을 결코 부족하지 않다. 이강인은 “찬스가 있으면 차고 싶고, 골을 넣을 수 있으면 넣으려고 한다”며 팀 플레이가 우선이지만,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이날 이강인에게서 월드 클래스 선수 여럿의 모습이 보였다. 메시의 키핑과 슈팅 동작, 케빈 더브라위너의 패스 플레이,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의 탈압박 등 기술적으로 최고 수준에 오른 선수들의 플레이 패턴을 자연스럽게 보여줬다. 이강인은 “메시도 그렇고 다른 축구 선수도 그렇고 좋은 게 있으면 보고 배우려고 한다. 그런 걸 한 것 같다”며 웃었다. 

이강인과 함께 투입되어 중원 플레이를 견고하게 받치고, 호쾌한 중거리슈팅으로 득점한 정호진도 기본기가 탄탄했다. 정정용 감독은 한국 축구의 미래 기대주가 선진 축구를 구현할 수 있도록 지휘하고 있다. 축구계 사정에 밝은 관계자는 김정민과 이강인이 주전 미드필더 조합이라고 했다. 두 선수가 함께 발을 맞출 때 어떤 플레이가 나올지 기대가 모인다. 

인도네시아와 경기에서 선보일 정정용호의 플랜A에, 위기론을 겪고 있는 한국 축구의 희망을 볼 수 있을까? 이날 오전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레전드 투어 현장에서 한국에도 무명 선수 출신이나 지도자로 성공한 요하임 뢰브나 율리안 나겔스만과 같은 인물이 나와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정용 감독은 한국의 뢰브가 될 수 있는 후보군 중 한 명이다.

글=한준 (스포티비뉴스 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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