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잭 그레인키 Gettyimages


[스포티비뉴스=박민규 칼럼니스트]2015년  LA 다저스에는 클레이튼 커쇼와 잭 그레인키가 버티고 있었다. 커쇼와  그레인키는 35승과 16.8 bWAR을 합작했고 다저스는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내셔널리그 서부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커쇼와 그레인키라는 에이스 듀오2001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랜디 존슨과 커트 실링을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은 제이크 아리에타(시카고 컵스)에게  내주고 말았지만 커쇼와 그레인키의 2015년은 메이저리그 역사에서도 손꼽힐 만한 시즌으로 남았다. 301개의 삼진을 잡은 커쇼는 2002년 랜디 존슨(334탈삼진) 이후 첫 300탈삼진  투수가 됐으며 그레인키는 1995년 그렉 매덕스(1.63) 이후  가장 낮은 평균자책점(1.66)을 기록했다그레인키의  조정 평균자책점 225는 라이브 볼 시대가 시작된 이후 역대 8위에  오를 정도로 훌륭한 수준이었다.

 

그레인키를 다시 사이영상급 투수로 만들어준 것은 체인지업이었다. 데뷔 초반 주요 변화구가  브레이킹 볼, 특히 슬라이더였던 그레인키는 다저스 이적 첫해인 2013년부터 체인지업을 적극적으로 구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레인키는 마침내 체인지업을 또 다른 결정구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완성해 냈다. 2015년 그레인키의 체인지업 구사율은 메이저리그 데뷔 후 가장 높았던 18.7%.  당시 체인지업의 구종 가치는 20.9로 메이저리그 전체 1위였으며  피안타율 역시 0.158(171타수 27안타)로 대니 살라자(0.155)에 이어 메이저리그 전체 2위였다.

 

체인지업은 또한 그레인키를 연봉 3,000만 달러짜리 선수로 만들어 줬다. 애초 다저스로부터 51억  5,500만 달러를 제시 받았지만 그레인키는 5,000만 달러를  더 얹은 6 2650만 달러의 승부수를 던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선택했다. 흥행 몰이를 할 수 있는 에이스를 원했던 애리조나와  높은 연봉을 원한 그레인키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지난해와 올 시즌 연봉이 3,400만 달러에 이르는 그레인키는 2020년과 2021년에는 3,500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다.

 

계약 첫해인 2016 ‘연봉 3,000만 달러짜리선수인 그레인키는 그러나 건강하지 않았고 위력적이지도  못했다. 왼쪽 복사근 부상으로 2005년 이후 가장 적은  26경기 등판에 그친 그레인키의 지난해 성적은 평균자책점 4.37,  158.2이닝으로 규정 이닝도 채우지 못했다. 지난해 그레인키가 부진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전체적으로 공이 스트라이크존으로 몰렸고 이를 타자들이 손쉽게 대처해 냈기 때문이다. 스트라이크 존안의 콘택트 비율이 85.1%에서 90.5%로 올라간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올 시즌 그레인키는 그의 이름값에 걸맞은 투구를 하고 있다. 15일 현재 8경기에 등판한 그레인키는 42패  평균자책점 2.79의 성적을 거두고 있다. 51.2이닝을  던진 그레인키가 잡은 삼진은 58개, 삼진 비율은 28.4%로  2011년의 28.1%를 뛰어넘는 개인 최고 기록이다. 올 시즌 두 자릿수 탈삼진 경기를 두 번이나 만들어 낸 그레인키는 지난 12, 8회에 홈런을 허용하여 노히터에는 실패했으나 8이닝 동안  1점만을 내주고 삼진 11개를 솎아 내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 그레인키 최근 5경기 성적 ⓒ 박민규 칼럼니스트


그레인키가 체인지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이유는 좌타자를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투 스트라이크 결정구가 슬라이더였던 그레인키는 사이영상을 수상했던 2009년에도 좌타자를 상대로 어려움을  겪었다(타율 0.250/OPS 0.651). 하지만 체인지업의  위력이 절정에 달한 2015년, 메이저리그 좌타자들은 자신들의  바깥쪽 코스의 공략이 가능해진 그레인키의 체인지업 앞에서 추풍낙엽과도 같았다(타율 0.194/OPS 0.535).

 

하지만 올 시즌 그레인키의 체인지업은 그 위력이 한풀 꺾였다. 지난해 그레인키는 부진한 가운데에도 체인지업의 위력만큼은 잃어버리지 않았다. 지난해 그레인키의 체인지업 피안타율은 0.212로 메이저리그 전체 15위였으나 올 시즌 피안타율은 0.343에 이른다. 우타자 상대 기록(5타수 4안타)을 제외한  좌타자 상대 기록만 놓고 봐도 0.267로 지난 2(2015 0.180/20160.228)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올 시즌 그레인키는 다시 한 번 변화를 시도했다. 슬라이더를 다시 꺼내 들기 시작한 것. 201519.1%였던 슬라이더 구사율은 올 시즌 27.2%까지 늘어났다. 이는 2009(19.2%)보다도 높은 수준으로 그레인키가 슬라이더의 구사율을 이렇게까지 늘린 것은 올 시즌이 처음이다. 또한 그레인키는 좌타자를 상대로 주로 체인지업을 구사했던 과거와는 달리 올 시즌에는 좌타자를 상대로도 슬라이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201515.5%/2017년  25.9%).

 

그레인키의 이러한 전략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투구 이닝보다 많은 탈삼진을 기록하고  있는 그레인키가 슬라이더로 잡은 삼진은 30. 이는  그레인키 본인이 기록한 전체 삼진의 51.7%이자 31삼진을  잡은 크리스 세일과 루이스 세베리노에 이은 메이저리그 6위이다. 그레인키의  슬라이더 피안타율은 0.16460타수 이상 기록한 투수  중 4위에 올라 있으며 그가 던지는 구종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

 

눈여겨볼 점은 그레인키의 슬라이더가 좌타자를 상대로도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올  시즌  좌타자에게 안타 4개만을 내준 그레인키의 슬라이더는 철저하게 좌타자의 몸쪽 낮은 코스에 정교하게 제구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공이 그 코스의 스트라이크존 가장 자리에 걸쳐있어 타자들에게 상당한 혼란을 주고 있다. 올 시즌 그레인키가 슬라이더로 좌타자의 몸쪽 낮은 코스를 공략한 비율은 70.2%로 지난해의 48.1%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그레인키가 더욱 적극적으로 슬라이더를 활용하는 이유는 많은 삼진을 잡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체이스필드는  다저스타디움과는 달리 타자 친화적인 구장이다. 지난 3년간  체이스필드는 ESPN의 파크 팩터 순위에서 단 한번도 10위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 인플레이 타구를 억제하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타자를 삼진 처리하는  것이다. 때문에 세이버메트릭스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이해도가 높은 그레인키는 삼진을 더 많이 잡기 위해  전과 달리 슬라이더를 더 많이 구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더 많은 땅볼을 유도하기 위해 투심 패스트볼(싱커)의 활용도를 높인 점(10.5%17.9%) 또한 장타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슬라이더의 구사율을 높인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 최근 3년간 그레인키의 슬라이더, 체인지업 성적 ⓒ 박민규 칼럼니스트



▲ 올 시즌 그레인키의 좌타자 상대 슬라이더 히트맵 ⓒ baseball savant


이제까지 성사된 투수의 장기 계약 가운데 성공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나이가 30대가 넘어선 투수의 경우 실패 가능성은 더욱 높다. 계약 기간이  올해를 포함해 5년이 남은 그레인키는 어느덧 나이가 3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레인키의 패스트볼 구속 감소가 아주 천천히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92.4마일→91.9마일→90.4마일). 구속이 대폭 감소하지 않는 한 성적이 크게 하락하지  않을 여지는 충분하다.

 

올해 33세가 된 그레인키의 계약은 성공 사례로 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슬라이더가 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 참조 : baseball-reference, fangraphs, baseball savant,  ESP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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