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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A-스토리]서정원②"바르셀로나 오퍼 사실…벤피카도 아쉬워"

기사승인 2020.08.07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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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피카와 포르투갈 전설 에우제비오(왼쪽, 유세비오라고도 부른다). 벤피카 입단 과정에 있던 서정원(오른쪽) 감독을 초청해 식사했다. ⓒ서정원 감독 제공

<①편에서 이어서…>

[스포티비뉴스=김건일 기자 이성필 기자]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스웨덴과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가 끝난 뒤 한국 라커룸은 시장처럼 시끄러웠다. 영문 모를 스페인 취재진과 현지 관계자들이 찾아온 것. 그때 한국 측 라커룸에 자원봉사자로 있던 스페인 유학생이 서정원(50) 전 수원 삼성 감독에게 귀띔했다. "FC바르셀로나(스페인)에서 '데려가고 싶어서 왔대요."

한국 축구 유럽파 계보는 독일 분데스리가를 누볐던 차범근(67) 전 축구대표팀 감독 이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거 박지성(39)으로 이어진다. 허정무(65) 현 대전 하나시티즌 이사장이 PSV에인트호벤(네덜란드)에 3년 몸담았지만, 상대적으로 기간이 짧다. 차 전 감독과 박지성 사이 16년. 어쩌면 유럽파 2세대는 박지성이 아닌 서정원 감독이었다.

"다른 사람도 (해외에서 이적 제안이) 많았지만 전 특히 많았어요. 1989년도 대학교 2학년 때 국가대표가 됐고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예비 엔트리로 갔거든요. 당시 막내였는데 그때 (축구 실력이) 정말 많이 늘었어요. 대학생이었고 월드컵을 뛰진 못했지만 같이 훈련하니까 정말 많은 것을 얻었어요.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으니까요. '꼭 뛰어서 골을 넣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규모와 분위기, '월드컵이 이런 것'이라고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때 생긴 꿈이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미국 월드컵에 출전하는 발판이 됐죠."

그랬다. 한국 축구 선수가 세계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무대는 월드컵 아니면 올림픽이 최선이었다. 국가대표의 시대, 프로축구 일정을 양해받아 해외 전지훈련을 하러 가서 연습 경기를 치르는 등 적어도 요령만 알았다면 얼마든지 해외로 나갈 기회가 있었다.

"해외에서 오퍼들이 왔어요. 데트마르 크라머 감독이 올림픽 감독이었는데 독일로 합숙 훈련을 하러 갔어요. 다 감독님의 제자였기 때문에 1부 리그 팀들과 연습 경기 성사가 잘 됐어요. 그때부터 (해외에서) 오퍼를 받기 시작했죠."

크라머 감독은 서 감독이 가장 애정하는 스승이다. 그에게 세계를 보는 눈을 뜨게 해줬다. 프로 생활에서 한 번도 빼먹지 않았던 이름이다. 그가 가르쳐준 몸 관리법은 여전히 지키고 있다. 현역이 아니지만, 여전히 커피 대신 차를 마시며 조금이라도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전지훈련에서 외국팀들이랑 경기하면 제가 봐도 정말 잘했고 생각대로 되더군요. 경기 끝나고 크라머 감독님이 '유럽에 올 생각 없느냐' 묻길래 '꿈입니다'라고 했는데 '세 팀에서 계약하자고 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유럽 진출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러다가 군대부터 해결하자는 목적이 생겼어요. 하필 군대에 있을 때 1994년 미국 월드컵을 하게 됐네요."

▲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앞뒀던 서정원

"솔직히 스페인전이 끝나고 영입 제안이 왔었어요. 그런데 제 소속팀이 '아미(Army)'라고 적혀 있었다더군요.(웃음) 저는 군대에 있었기 때문에 생각도 못 했어요."

서 감독은 선수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에게 이적 제안을 했던 유럽 구단들을 하나하나 언급했다. 언론 보도로 알려진 바르셀로나와 벤피카(포르투갈) 외, 독일과 프랑스 구단까지 역사가 깊고 이름 있는 구단들이 줄이어 서 감독의 입에서 나왔다. 흥미롭게도 서 감독의 스마트폰엔 여전히 과거 자료들이 저장돼 있었다.

#1. 바르셀로나(스페인)

세계 최고 선수들이 모이는 월드컵에는 유명 스카우트들이 집결한다. 월드컵 못지않게 관심이 쏠리는 곳이 올림픽이다. 23세 이하(U-23) 출전이라는 연령 제한이 있기 때문에 미래의 스타를 발굴할 수 있는 최적의 대회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U-23 연령 제한을 도입한 첫 번째 대회. 한국 축구 최고 유망주 중 한 명이었던 서 전 감독은 조별리그에서 빠른 발과 날카로운 드리블로 측면을 지배했고, 스웨덴과 마지막 경기에서 수비 뒷공간을 파고들며 득점해 화룡점정을 찍었다.

"1991년에 크라머 감독님과 해외로 전지훈련을 갔어요. 마지막 경기로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스페인 올림픽팀과 경기했는데 그때 우리 팀이 경기를 정말 잘했어요. 당시 상대 팀에 펩 과르디올라(현 맨체스터 시티 감독)도 있었어요. 그때부터 (저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마침 올림픽을 바르셀로나에서 했기 때문에 스페인 쪽에서 내가 치른 3경기를 유심히 봤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은 모로코에 1-1, 파라과이에 0-0으로 비겼다. 서 감독은 두 경기 모두 선발로 출전해 뛰었다. 스웨덴과 3차전은 전반 28분 골까지 터트렸다. 주장 완장을 차고 골을 넣었으니 돋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3무로 녹아웃 스테이지에 가지는 못했지만.

"스웨덴전이 끝나자마자 라커룸에 들어가는데 스페인 사진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뜨리며 난리가 났다. '이게 뭐지' 하고 있는데, 자원봉사자가 '바르셀로나에서 저 데려가고 싶어서 왔다'며 울먹거리더라고요. 자원봉사자가 바르셀로나 유학생이어서 바르셀로나 구단의 위상을 잘 알았으니 그런 반응이었죠. (대회가 끝나고) 일주일 동안 김삼락 감독님께서 스페인 구단들로부터 저녁 식사 초대를 많이 받았는데.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죠."

▲ 1997년 1월 쾰른 지역지 1면에 실린 서정원 의 쾰른 입단 기사. 한국어로 환영 인사가 적혀 있다. ⓒ서정원 감독 제공

#2. 쾰른(독일) & 스트라스부르(프랑스)

서 전 감독은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 한 장을 보여 줬다. 1997년 1월 9일 독일 지역 신문에서 나온 기사 1면이었다. 서 감독은 배번 27번 트레이닝복을 입고 눈밭에서 훈련하고 있었고, 놀랍게도 제목엔 '한국의 축구 영웅을 환영합니다. FC 쾰른을 위해 많은 골을 기록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라고 한글로 적혀 있었다.

"쾰른 감독이 '한 번만 운동했으면 좋겠다'라고 하더라고요. 전 '테스트는 싫다'고 했는데 '한 번만 하자'고 해서 딱 한 번 딱 운동했어요. 그리고 오케이 됐죠. 다음 날 기사가 났어요. 그런데 왜 못 갔느냐. 이적료 때문이었죠."

이적료 문제와 관련해서는 서 감독이 다수 언론을 통해 많이 이야기한 바 있다. 서 감독의 당시 소속팀 안양LG가 이적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해외 이적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적료를 50대50씩 분배받는 것에서 부족해 구단이 다 가져가라고도 했지만, 이 역시 자주 꼬인 아픔이 있다. 

"처음엔 스트라스부르(프랑스)가 아니었어요. OSC릴(프랑스)이었습니다. 릴에서도 '운동을 한 번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한 번 하고 그날 저녁 오케이 사인이 났습니다. 이적료도 맞췄어요. 호텔로 구단과 감독이 찾아왔죠. 그런데 '지금 이적료를 다 줄 수 없다'며 반반으로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무산됐습니다. 다음 날 스트라스부르에서 연락이 왔고 거기에선 일시불로 다 줄 수 있다고 해서 바로 사인했어요."

▲ '야망이 있는 팀'으로 불렸던 벤피카, 독수리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서정원(오른쪽 두 번째). ⓒ서정원 감독 제공
▲ '야망이 있는 팀'으로 불렸던 벤피카, 독수리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서정원. 1997-98 시즌 오른쪽 측면 주전 공격수로 예상됐다. ⓒ서정원 감독 제공

#3. 벤피카(포르투갈)

벤피카 이름이 나오자 서 감독의 얼굴에 웃음이 만발했다. 그리고 서 감독이 보여 준 사진. 훈련에 앞서 찍은 단체 사진은 물론 벤피카 경기 선발 라인업에 오른쪽 측면 공격수로 서 감독이 올라 있었다. 등번호가 9번인 벤피카 유니폼 사진도 있었다.

"벤피카에서 오퍼가 와서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때 벤피카가 전반기에 너무 못했어요. 강등 걱정까지 할 정도로 비상이 걸렸거든요. 그들이 계약서를 내 앞에 두고 조건을 걸었어요. 우리가 전반기에 너무 처져 있었기 때문에 후반기에 대표팀 차출이 안 된다는 조건이었어요. 그때 대표팀은 1998 프랑스월드컵 예선이 잡혀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적 동의서(ITC)가 안 날아왔다. 사실 대표팀 차출 불가는 맞지 않는 이야였는데 벤피카는 너무 급한 상황이었어요. 그때 유니폼에 등번호 9번 받고, 사진 다 찍고, 달력 받고, 거의 입단한 것과 같았어요. 당시 유명한 선수로는 2002 한일월드컵에 포르투갈 대표로 출전해 우리와도 경기했던 주앙 핀투, 누노 고메스 등이 있었고 전 오른쪽 윙어였어요. 벤피카 공식 기록엔 4경기를 뛰었다고 나와 있거든요. (프리시즌) 골도 넣었어요."

서 감독은 벤피카와 계약서까지 쓰고 요즘으로 치면 프리시즌 경기에도 출전해 골까지 넣었다. 흔한 연습생이 아니라 '벤피카 정식 선수' 신분이었다. 지난 2017년 2월 기자가 타사 재직 시절 벤피카를 취재 갔을 당시 국내 최초로 확인한 부분이다. 이적료 1백만 달러(당시 9억 원), 연봉 50만 달러(4억5천만 원)에 입단 계약서 도장까지 찍었지만, 축구협회가 벤피카에 ITC를 발급해주지 않아 최종 무산됐다. 최종예선을 뛰지 않는다는 조건이 축구협회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렇지만, 벤피카는 서 감독을 기억하고 있었다. 홈구장 '다 루이즈'의 박물관에 서 감독을 벤피카 선수로 기록해놓았다. 기자를 통해 벤피카의 상황을 알았던 서 감독은 현지를 직접 방문해 잊고 싶었던 역사를 되찾았다. 

"지난 겨울(코로나19 사태 이전)에 가족과 포르투갈을 갔어요. 경기를 보러 갔는데 구단 측과 연결이 됐어요. 박물관에 갔는데 정말 내 이름이 있더라고요. 벤피카 이사가 나와서 '찾아 줘서 고맙다'라며 유니폼까지 만들어 줬어요. 최근 유니폼에 내 이름을 새겨서요. 예우가 대단해요.

▲ 벤피카를 방문해 등번호 9번을 새로(?) 받은 서정원 감독 ⓒ서정원 감독 제공
▲ 2001년 3월 수원 삼성과 산둥 루넝의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돌파를 시도하고 있는 서정원.

#4. 한국으로 복귀

서 전 감독은 이적료 110만 달러에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로 이적하면서 한국인 1호 르 샹피오나 선수가 됐다. 입단하자마자 12경기에서 4골을 넣는 맹활약으로 팀을 강등권에서 구해 내며 핵심 선수로 자리 잡았다. 당시 팬들은 서 감독의 성 'SEO'를 발음하기 어려워 '쎄오'라고 불렀는데 덕분에 스트라스부르 경기 때마다 "쎄오"가 경기장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서 감독의 유럽 꿈은 2시즌을 넘지 못했다. 2번째 시즌 갑작스러운 감독 교체에 벤치로 밀려났고 계약 기간 종료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수원에서 여전한 기량을 발휘하며 다시 해외 구단으로부터 관심을 받았으나 이번엔 십자인대가 끊어졌다.

"실력이 부족했을 수 있죠. 프랑스에선 정말 잘했거든요. 경기 홍보 광고를 저로만 했고 옥외 간판까지 다 제 사진으로 했어요. 그런데 팀이 개편됐어요. 카메룬에 있던 감독(르네 지라르)이 부임하면서 선수 10명을 데려왔어요. 그러자 원래 뛰던 선수들이 한 명도 못 뛰었고, 그나마 기존 선수 중에선 나하고 프랑스 대표팀 선수 한 명만 뛰었어요. 그런데 이 선수도 나가면서 벤치에 저만 남게 됐어요."

주전 자원이 벤치를 지키고 있으니 스트라스부르 팬들 입장에서는 황당함 그 자체였다. 터치라인에서 몸을 푸는 서 감독을 향해 "나가라"고 외치는 팬도 있었다. 

"선발로 안 나가서 벤치에서 경기를 보는데 3만 명의 팬이 제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어요. 저도 깜짝 놀랐죠. 3만 명이 "쎄오"를 외쳤으니까요. 감독이 아니라 팬들이 절 뛰게 했어요. 그래서 경기에 나갔고, 다음 경기 또 나갔죠. 언론에서도 왜 감독이 저를 안 뛰게 하는 건지 의문을 제기했죠."

"후반에 교체로 나오면 잘하는데 다음 경기에서 또 후보 선수였어요. 이유가 있었어요. 제가 유럽연합(EU) 소속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에였죠. EU 한자리를 제가 차지하고 있어서 자신이 데려오고 싶은 선수를 못 데려왔어요. 기사도 났더라고요. 저야 화가 났죠. 그러자 스위스로 임대를 가라고 했는데 거부했죠."

근성으로 버티며 더 뛰려고 했지만, 속이 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부당한 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국내 복귀를 택했다.

"그때 한국에서 들어오라는 제안이 있었고 한 달 뒤 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경기를 뛰어달라더라고요. 4경기 뛰었는데 다 잘했다. 참 웃기게도 독일에서 영입 제안이 왔어요. 그런데 스트라스부르에서는 가지 말라고 그래요. 머리가 아팠어요. 수원은 제가 '유럽이 너무 아깝다, 하고 싶다'고 하자 '1년 후 유럽에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복귀한 한국에서) 몸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십자인대가 끊어졌어요. 그때 수원이 5년 계약서를 들고 오더라고요. 병원비부터 모든 것을 다 해줬어요. 이런 배려를 받았죠."

수원에서 6시즌을 보낸 서 감독은 유럽 무대를 향한 열망을 놓지 못했고 2004-05시즌 끝내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로 향했다. 이때 그의 나이 34세였다.

서 감독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한 시즌, SV리트에서 두 시즌을 보낸 뒤 선수 생활을 끝냈다. 30대 후반에 36경기 중 25경기에 베스트11 선정됐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바르셀로나 벤피카, 그리고 서 감독에게 영입 제안을 했던 셀 수 없는 유럽 구단들과 가지 못했던 현실. 서 감독은 유럽을 꿈꾸며 보냈던 자신의 축구 인생을 '파란만장했다'고 돌아봤다.

그러나 인생은 새옹지마. 유럽에서 짧게나마 거쳤던 한 명, 한 명이 현재 지도자로 변신한 서 감독을 돕게 될 줄은 몰랐다.

<③편에서 계속…>

스포티비뉴스=김건일 기자 이성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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