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김진영 감독(왼쪽)은 1983년 30승을 올린 장명부와 함께 삼미 슈퍼스타즈의 돌풍을 일으켰다. 그해 6월 1일 발생한 두발당성 사건으로 구속된 김진영 감독은 이후 '시즌 종료까지 자숙한다'는 조건으로 석방되면서 유니폼을 입고 팀을 지휘할 수 없었다. 경기 전 사복 차림으로 장명부와 작전 회의를 하고 있다. ⓒKBO
[스포티비뉴스=인천, 이재국 기자] "짜장면 시켜줄까? 뭐 먹고 싶냐?"

1983년이니 벌써 37년 전의 일이다. 김경기(52) SPOTV 해설위원은 3일 부친상으로 인천의 장례식장을 방문한 지인들과 고인에 대한 추억을 돌아보면서, 1983년 그 유명한 두발당성 사건으로 아버지가 구속됐을 때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면회를 갔는데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당당하고 싶었나봐요. 흰고무신을 신은 채 구치소에서 아들한테 짜장면 시켜주겠다며 전화기를 들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아버지는 '인천야구의 대부'로 불린 김진영 감독이다.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삼미와 청보 감독을 맡았고, 1990년에는 롯데 감독을 역임했다. 1994년 미국 애틀랜타로 이민을 가서 살다가 플로리다에서 노환으로 3일 오전 5시, 85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 김경기 SPOTV 해설위원 ⓒ한희재 기자
◆고 김진영 감독의 ‘두발당성 사건’의 전말

삼미는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창단 사령탑인 박현식 감독이 13경기(3승10패) 만에 성적 부진을 이유로 경질되고, 이후 이선덕 감독대행이 지휘봉을 잡았지만 80경기에서 15승65패로 프로야구 역사상 최저 승률(0.188) 기록을 세웠다. 지금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그랬던 삼미가 1년 만에 완전히 다른 팀이 됐다. 1983년 '인천야구의 대부' 김진영 감독을 영입한 뒤 돌풍을 일으켰다. 새롭게 가세한 재일교포 투수 장명부가 30승을 기록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여기에 국가대표 출신 임호균이 12승 투수로 가세해 원투펀치를 형성하면서 1982년 약체의 대명사였던 삼미는 강팀으로 탈바꿈했다.

1983년에는 한 시즌 100경기를 하던 시절. 전기리그(50경기) 우승팀과 후기리그(50경기) 우승팀끼리 한국시리즈를 치르는 방식이었다.

아마추어 감독 시절 '맹장(猛將)'으로 이름을 날렸던 김진영 감독은 삼미를 맡자마자 전기리그부터 팀을 선두로 끌어올리며 반란을 지휘했다.

그러나 호사다마일까. 6월 1일 '문제'의 그 일이 터졌다. 잠실구장에서 MBC 유종겸과 삼미 임호균의 선발 맞대결이 펼쳐진 가운데 삼미는 경기 후반까지 0-1로 뒤졌다. 8회초 2사만루 찬스. 여기서 최홍석의 좌전 적시타가 나왔다. 3루주자인 재일교포 이영구가 홈을 밟았고, 2루주자 이선웅도 홈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2-1로 역전이 되는 상황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때 MBC 좌익수 김정수(작고)가 홈송구를 포기하고 3루로 던졌고, 1루에서 3루까지 달리던 김진우(작고)를 잡아냈다.

문제는 그 다음. 김동앙 주심이 "2루주자 이선웅이 홈을 밟은 것보다 1루주자 김진우가 3루에서 태그아웃된 것이 더 빨랐다"며 2번째 득점을 무효로 선언했다.

불같은 성격의 김진영 감독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라운드로 뛰어나와 맹렬히 어필했다. 그러나 어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한번 내려진 판정도 뒤집어지지 않았다. 경기가 중단된 뒤 항의 시간이 길어지자 급기야 잠실구장 백스톱 그물 뒤에서 이기역 심판장이 경기속행을 종용했다. 그러자 김진영 감독은 흥분한 채로 그물 쪽으로 달려가 이기역 심판장을 향해 이단 옆차기를 했다. 그러나 그물이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이기역 심판장에게까지 발은 닿지 않고 오히려 스파이크 징이 그물에 걸리면서 김진영 감독은 그물 반동으로 그라운드에 거꾸로 나뒹굴었다.

▲ 고 김진영 감독의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 시절 모습 ⓒKBO
◆TV 생중계 보던 대통령 한마디에 구속된 김진영 감독

전기리그 우승을 위해 워낙 중요했던 경기. 당시 이 경기는 TV로 생중계됐다. 김 감독의 두발당성 장면도 자연스럽게 TV를 통해 전국으로 생방송됐다.

전해진 뒷얘기로는 전두환 대통령이 이 경기를 TV로 시청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한마디를 했다.

"저러면 안 되는데."

삼미는 이날 결국 MBC에 1-2로 패했고, 부산으로 이동해 이튿날 롯데를 4-1로 꺾었다. 그런데 경기 후 사복을 입은 낯선 남자들이 부산 구덕구장에 들이닥쳤다. 김진영 감독에게 구속영장을 보여주더니 서울로 압송했다. 삼미 관계자들이 사정을 하면서 야구장 안에서는 수갑을 채우지 않았지만 야구장을 나오자마자 수갑까지 채워서 차에 태웠다.

지금 같으면 어디까지나 KBO 차원에서 징계를 내려야할 사안. 그러나 당시는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이었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아래에서 재빠르게 움직였고, ‘사회정화’ 차원에서 ‘폭력사범’이라는 이유로 구속을 시킨 것이었다.

감독을 잃은 삼미는 이재환 감독대행이 팀을 맡았지만 전기리그 우승을 해태에 내주고 말았다. 특히 삼미는 24승14패로 남은 12경기에서 반타작만 해도 30승 고지에 올라 우승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했지만 통한의 뒤집기를 당해 더욱 뼈아팠다. 김응용 감독이 처음 지휘봉을 잡은 해태는 전기리그에서 14경기 중 10승을 거둬야만 30승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삼미는 광주에서 해태에 치명적인 3연패를 당하면서 선두를 내주더니 결국 전기리그 우승에 실패했다.

▲ 삼미 슈퍼스타즈를 인수해 1985년 후기리그부터 리그에 뛰어든 청보 핀토스. 김진영 감독(오른쪽)이 인천야구를 지휘한 마지막 시즌이다. ⓒKBO
◆흰고무신 신고 짜장면 주문하던 아버지

김경기 해설위원은 당시 인천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아버지를 면회하기 위해 서울 강남경찰서를 찾아갔다. 당연히 철장 안에 있는 아버지를 면회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경찰서에 도착하니 그런 게 아니었다. 경찰서장실로 안내를 받았고, 아버지는 거기에 태연히 앉아 있었다.

남자다운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인 아버지는 대뜸 아들에게 "뭐 먹고 싶냐. 짜장면 시켜줄까"라고 묻더니 전화기까지 들었다고 한다.

"수의를 입고 나오실 줄 알았는데 복장은 평소 아버지가 입고 계시던 옷 그대로였어요. 도망가지 말라는 뜻에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신발은 흰고무신을 신고 계신 게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리고 경찰서장 방에서 면회객을 맞이하셨어요. 경찰서장도 위에서 구속하라고 하니 아버지를 구속하긴 했지만 그 정도 일이 구속할 만한 사안은 아니라고 본 것이겠죠. 아무튼 아버지는 그 방에서 마치 경찰서장처럼 행동하시더라고요. 아무래도 아들 앞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김진영 감독은 구속 10일째인 6월 11일 벌금 100만원을 내고 약식기소로 석방됐다. 막후교섭에 따른 결과였는데 '석방 뒤에 시즌 종료까지 자숙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에 따라 감독은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경기 시작 전에 작전 회의를 한 뒤 경기가 시작되면 장외에서 원격 지휘할 수밖에 없었다.

삼미는 후기리그에서도 한때 선두에 나서기도 했지만 결국 MBC에 이어 공동 2위를 차지하면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만약 김진영 감독이 구속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한국프로야구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 김진영 감독은 1990년 롯데 감독을 맡았다. 같은 해 태평양에 입단한 아들 김경기와 프로야구 최초 부자 대결로 관심을 모았다. ⓒKBO
◆김재박에 앞서 국가대표 유격수 계보 이은 '인천야구의 대부'

1935년생인 고 김진영 전 감독은 인천고를 나와 한국전쟁 이후 전인천(55년), 육군(56~59년), 교통부(60~62년), 철도청(63~64년)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작은 체격이었지만 각종 대회의 타격상과 홈런상을 수상했고, 고교 시절부터 미기상을 휩쓸 정도로 유격수 수비가 발군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야구 유격수 계보는 강대중~김진영~하일~김재박~류중일~이종범~박진만~강정호로 이어져 왔다. 다시 말해 김재박 이전 한국 국가대표 유격수는 김진영이었다.

1958년 스탠 뮤지얼 등 스타플레이어를 보유한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방한경기를 펼쳤을 때 대표선수로 뛰었고, 1959년 아시아선수권 대회 등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늘 유격수 자리를 지켰다.

지도자로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해병대(1967~69년)에서 처음 감독 자리에 오른 그는 1968년 팀을 전국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이끌며 지도자로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중앙대 코치(1970~1971년)와 중앙대 감독(1972~1979년), 인하대 감독(1981~1982년)을 거친 뒤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 사령탑을 맡아 돌풍을 일으켰다. 1985년 후기리그부터 삼미 슈퍼스타즈를 인수한 청보 핀토스를 지휘한 것을 마지막으로 인천 야구를 떠났다.

1990년에는 롯데 자이언츠 사령탑을 맡았는데, 고려대를 졸업한 아들 김경기가 태평양에 입단하면서 롯데-태평양전은 프로야구 최초 부자지간 대결로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아버지 김진영 감독은 '인천야구의 대부'로 불렸다. 아들 김경기는 '미스터 인천'이라는 애칭으로 오랫동안 인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인천야구를 세우고 일으킨 부자는 3일 머나먼 곳에서 영원한 작별을 하고 말았다.

"미국 플로리다에 어머니와 동생들이 살고 있는데 아버지가 노환으로 보름 전부터 음식을 못 드셨고, 5일 전부터는 물도 못 마신다고 해서 가족들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습니다. 주무시다가 가족 고생시키지 않고 편하게 돌아가셨다고 하네요. 자식된 도리로 미국을 가야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 미국에 있는 가족들이 장례식을 치르고 저는 한국에서 아버지를 기억하시는 분들의 인사를 대신 받고 있습니다."

빈소는 인천 청기와장례식장 101호, 발인은 5일 오전 6시. (032)583-4444.

스포티비뉴스=인천, 이재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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