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용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식사 좀 하시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밥은 매일 먹는 거고 오늘 같이 기분 좋은 날, 밥 안 먹도 되니까 나 좀 냅둬"라며 손사래를 쳤다. 식탁에 뷔페 한 접시를 놓고는 식사 대신 주변 사람들과 끝없이 옛이야기를 풀어놓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10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리베라호텔에서 열린 김응용 전 감독의 팔순연. 제자 100여 명이 참석한 성대한 잔치였다. 이순철 전 한국프로야구은퇴선수협회장(SBS 해설위원)이 김응용 감독 팔순연 추진위원장을 맡고, 선동열 전 국가대표 감독을 비롯한 제자들이 나서서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이순철 추진위원장은 "2015년 수원에서 열린 올스타전 때 감독님 은퇴식을 겸해 시구 행사가 있었다. 그때 모였던 제자들이 팔순 잔치를 열자고 의기투합했는데 오늘 이렇게 진짜 팔순 잔치까지 이어지게 됐다"며 웃더니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오늘 잔치를 열고, 남은 금액은 유소년 돕기나 야구 발전을 위한 성금으로 내놓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김응용 회장의 생일은 호적상 1941년 9월 15일이지만, 실제로는 음력으로 1940년 3월 1일이다. 그러나 그때는 프로야구가 개막할 즈음이라 한 자리에 모이기 어려워 이렇게 앞당겨 12월에 팔순연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이날 '김응용 감독님 팔순연'에 참석한 제자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슈퍼스타들이 대거 찾아왔다. 해태 시절 1980년대 후반 4연패(1986~1989년) 신화를 만들 때 수석코치였던 김인식 전 국가대표 감독을 비롯해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박영길 전 롯데~삼성~태평양 감독, 유승안 김성한 양승호 한대화 선동열 류중일 이강철 조계현 김태룡 등 전·현직 프로야구 감독과 단장들도 직접 찾아 축하를 보냈다. 장채근 홍익대 감독과 이건열 동국대 감독 등 아마추어 야구계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제자들, 양준혁 이종범 이승엽 마해영 이대진 이호준 장성호 강영식 등 해설위원과 지도자로 야구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제자들도 자리를 빛냈다.김응용 회장은 "내가 한일은행에서 감독할 때 저기 앉아 있는 저 친구도 선수였다"며 웃었다. 건너편 자리에서 박영길 감독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강병철(73) 전 롯데 감독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프로야구 감독으로만 역대 최다인 2910경기를 지휘하면서 통산 최다승(1554승), 한국시리즈 최다 우승(10회) 등 화려한 전적을 빚어낸 한국야구 최고의 승부사. 그러나 팔순을 맞이하는 '코끼리 감독'은 영광의 기억보다 아쉬움과 회한이 밀려드는 모양이다. 자꾸 "미안했다"는 말만 반복했다.
"제자들을 오늘 보니 미안한 마음이 앞서. 젊었을 때 승부에만 몰두해 선수들을 너무 괴롭혔던 것 같아. 오늘 큰절을 하고 사과를 하려고 했는데 집사람이 말리더라고."
한대화 KBO 경기운영위원을 보더니 "한대화한테도 미안한 일이 많아"라고 운을 떼면서 "예전 OB에서 해태로 트레이드했을 때 안 오겠다고 한 게 생각난다. 근데 해태 와서 해결사 됐어"라며 웃었다.
자연스럽게 1993년 올스타전 때 더그아웃에서 김 감독이 한대화에게 발길질을 한 해프닝이 화제에 올랐다. 당시 그 장면이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다. 한대화 위원은 "한여름 인조잔디 사직구장에서 다이빙캐치를 하다 손바닥에 화상을 입어 얼음찜질을 하다 타석이 돌아온 것도 모르고 있다가 감독님한테 혼이 났다"고 기억을 돌이켰다.
이 일로 인해 마음이 상했던 한대화는 다음날 훈련에 불참했고, 그해 말 해태에서 LG로 트레이드됐다. 그러나 26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지금, 그도 김응용 회장도 웃으면서 그 시절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다.
한대화 경기운영위원은 "저희 아버지 고향이 감독님 고향(평안남도 평원)과 40㎞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선수 때 그 말씀을 드렸으면 더 잘 봐줬을 텐데 나중에 삼성에 코치로 가서 그 말씀을 늦게 드렸다"고 말해 주변의 폭소를 자아냈다.
김응용 회장이 미안한 마음을 전한 기억은 또 하나 있다. 바로 해태 시절 마당쇠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은 방수원에 대한 기억이다. 1987년 어느 날, 김응용 감독이 교체를 하기 위해 마운드로 향하자 방수원은 공을 뒤로 감춘 채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고 김 감독은 공을 뺏기 위해 계속 따라갔다. 방수원은 2루 근처에서 결국 공을 빼앗긴 뒤 덕아웃에 들어가 혼이 났다.
김응용 회장은 "5-0으로인가 이기고 있다가 점수를 자꾸 주면서 5-3까지 쫓겼나? 아웃카운트 하나 더 잡으면 승리투수가 되니까 공을 안 주려고 했던 거지"라고 기억을 더듬었다(방수원은 이날 팔순연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과거 기자와 인터뷰에서 "한 타자만 더 잡으면 세이브여서 그랬다. 항명을 하는 바람에 그날로 엔트리에서 빠졌다"고 회상해 김 감독과 기억에 약간 차이가 있다).
김 감독은 그 제자가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난 오로지 이기기 위한 야구에만 몰두했어. 프로야구 선수면 개인성적도 있으니 배려도 해줘야 하는데 그게 없었어. 그래서 옛날 생각하면 정말 너무했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라고 덧붙였다.
허구연 해설위원에 대한 이야기도 끄집어냈다. "한일은행 선수로 뛰다 '1년만 더 야구를 하다가 공부를 하겠다'고 해서 그길로 그냥 은퇴를 시켜버렸다"고 소개했다. 야구선수보다 학업에 더 큰 뜻이 있다면 1년이라도 먼저 공부를 하라는 뜻으로 은퇴를 시켰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또한 미안한 일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프로야구 출범하고 마이크 잡고 해설가가 돼서 나타나더라. 해설가로 성공했지"라며 웃었다.
김응용 회장이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제자들과 옛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맞은편 테이블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이승엽 KBO 홍보대사가 일어서서 "김응용!" 선창을 하자 김성한 등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코끼리!"라고 외쳐 장내에 폭소가 터졌다. 자신의 별명으로 건배사를 하는 제자들이 밉지 않은지 김응용 회장도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행사장을 가로질러 이승엽이 있는 테이블에 앉아 다시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날 제자 대표로 황금열쇠를 전달한 이승엽은 김응용 회장에게 "감독님과 3년 정도(2001~2003년) 야구를 함께했는데 그때는 정말 힘들었던 것 같다"고 고백하더니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때가 가장 편하게 야구를 했던 것 같다. 감독님은 거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간섭하지 않고 믿고 맡겨주셨던 것 같다"고 설명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칼끝 같은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온 지독한 승부사도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 젊은 날의 무서웠던 표정과 몸짓조차 온화하게 변했다.감사의 뜻을 전하면서도 과거에 살갑게 대해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전한 스승, 자주 찾아뵙지 못해 미안해하면서도 늦게나마 고마운 마음을 전달한 제자들…. 프로야구 슈퍼스타 출신 제자들이 총출동해 야구 역사상 최초로 마련한 김응용 감독의 팔순연은 삭막하고 추워진 세밑을 훈훈하게 만들어줬다. 사람이 살아가는 정과 깊은 맛을 알게 해준 뜻깊은 자리였다.
스포티비뉴스=청담동, 이재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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