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7월22일(현지시간)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펜웨이파크에서 열린 레드삭스 레전드 테드 윌리엄스 추모행사에서 팬들이 윌리엄스가 한국전쟁 당시 미국 해병대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던 사진을 보고 있다.

[스포티비뉴스=LA(미국 캘리포니아주), 양지웅 통신원] 6·25 한국전쟁은 우리 한국인들에겐 잊지 말아야 할 비극이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 사이에 있었던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이다.

하지만 그 시절 미국에서 메이저리그 선수 생활을 하다 국가의 부름을 받고선 갑자기 야구를 멈추고 머나먼 낯선 땅 한국까지 와서 참전을 해야 했던 메이저리거들도 있다.

미국은 당시 자원 입대한 군인들로 구성된 군대가 부족할 때 18~25세 사이의 남성들을 상대로 징집을 실시했다. 미국 역사에서 독립전쟁, 남북전쟁, 세계 1·2차대전, 6·25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때 이런 징집을 했다.

한국 영토에 직접 날아간 참전 용사도 있고, 전쟁 기간 중에 징집된 뒤 미국에서 대기하면서 군대 야구만 했던 선수도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선수로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테드 윌리엄스와 올 2월 타계한 초대 사이영상 수상자 다저스 레전드 돈 뉴컴이 있다. 2명 모두 한국까지 날아온 참전 용사다. 6·25 한국전 발발 69주년을 맞아 그 시절 징집된 메이저리거들에 대해 알아본다.

◆마지막 4할타자 테드 윌리엄스…전투기 조종사로 39번 전투 임무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출신인 윌리엄스는 21세 때인 1939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첫 시즌에 리그 최다인 145타점과 타율 0.327, 31홈런을 쳤다. 신인왕이 없던 시절이라 상은 받지 못했지만 데뷔 첫해부터 발군의 타격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41시즌은 아직도 전설로 회자된다. 그해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윌리엄스는 타율 0.39955를 기록하고 있었다. 반올림을 하면 4할 타율. 감독이 윌리엄스에게 벤치에서 쉬면서 4할 타율을 유지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는 마지막 경기(더블헤더)에 모두 출전해 8타수 6안타를 치며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전설의 시즌 타율 0.406을 기록했다. 이것이 메이저리그 역사상 마지막 4할타율로 남아 있다.

1942년 타율, 타점, 홈런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며 최초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윌리엄스는 1943~1945년 3년간 메이저리그를 떠나 군복무를 했다. 제2차 세계전쟁 기간 중 해군 예비역으로 복무하면서 비행기 조종 훈련 과정을 이수하고 나중에는 해병대 예비역 소위로 해군 비행교육대 교관 생활을 한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메이저리그에 돌아온 윌리엄스는 1946년 시즌 타율 0.342, 142타점, 38홈런을 기록하며 아메리칸리그 MVP에 선정됐다. 그 다음해 1947년 생애 두 번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윌리엄스는 다시 한번 전쟁으로 인해 1952년과 1953년 메이저리그를 떠나게 된다. 이번에는 교관이 아닌 해병대 전투기 조종사로 한국전에 참전해 총 39번의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윌리엄스는 1966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1991년에는 미국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다.

▲ 다저스 레전드 돈 뉴컴이 2014년 7월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경기 전 시구를 하기 위해 마운드로 걸어가면서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최초의 사이영상 수상자 돈 뉴컴…생전 류현진에게 각별한 애정

돈 뉴컴은 1949년 뉴욕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데뷔하자마자 그해 17승을 올리며 신인상을 받았다. 1950년에는 19승, 1951년에는 20승으로 성적을 향상시켰다.

승승장구하던 뉴컴은 26살때인 1952년에 징집됐다. 미국 육군 소속으로 한국으로 떠난 그는 야구와 전혀 상관없는 전쟁터에서 2년의 젊은 날을 보낸다.

1954년 메이저리그에 복귀했지만 9승8패 4.55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예전의 모습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뉴컴은 다음해인 1955년 다저스의 첫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하고, 1956년에는 리그 최다인 27승7패를 기록하면서 그해 신설된 사이영상을 최초로 수상(1956~1966년에는 양대리그 통틀어 1명만 선정)하는 영예를 안았다. 아울러 내셔널리그 MVP를 동시에 수상하는 최고의 해를 보냈다.

류현진의 다저스 대선배이기도 한 뉴컴은 지난 2월에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항상 "나는 피하지 않고 내 나라와 국기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며 한국전 참전을 항상 자랑스러워했다.

뉴컴은 그래서 생전에 한국에서 온 류현진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보였고, 류현진도 뉴컴이 타계했을 때 애도의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최근 뉴컴의 아내인 캐런이 다저스타디움을 방문해 류현진에게 뉴컴이 착용했던 넥타이 핀을 선물하겠다고 약속을 하기도 했다.

▲ 뉴욕 양키스 레전수 좌완투수 와이티 포드가 2010년 7월17일 미국 뉴욕주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린 '제64회 올드타이머의날' 행사에서 관중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236승의 전설 에드워드 찰스 '화이티(Whitey)' 포드

16년간 뉴욕 양키스에서 좌완투수로 활약한 에드워드 찰스 '와이티(Whitey)' 포드는 1950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자마자 한국전이 발발해 징집됐다.

하지만 포드의 군생활은 한국이 아닌 미국 뉴저지주 육군 야구팀에서 주로 했다. 포드는 생전에 "육군팀에서 일주일에 3번이나 선발 출전하며 혹사당했다"고 농담하며 회상했다. 복무기간 중인 1951년 4월17일 뉴욕에서 열린 뉴욕 양키스-보스턴 레드삭스 경기에는 자랑스럽게 육군복을 입고 경기전 시구를 하기도 했다.

포드는 올스타에 10번 선정됐으며 1961년 사이영상과 월드시리즈 MVP상을 수상했다. 양키스가 6번 월드시리즈 우승하는 것에 큰 기여를 했으며 1974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양키스는 같은 해 포드의 등번호 16번을 영구결번으로 처리했다. 포드는 메이저리그에서 16년 동안 활약하며 통산 236승106패(승율0.690), 2.75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 윌리 메이스(왼쪽)가 2015년 11월2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안관에서 버락 오바바 대통령에게 미국 민간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인'자유의 훈장'을 받고 있다.
◆개인통산 660홈런 윌리 메이스

22시즌이나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윌리 메이스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선수 생활 대부분을 뉴욕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한 메이스는 현재 메이저리그 역대 5위에 해당되는 개인통산 660개의 홈런을 쳤다. 내셔널리그 MVP를 2차례 수상했으며, 12차례 골든글러브를 수상해 역대 공동 1위에 올라 있다. 1979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메이스는 생전에 한국전 기간의 군복무 생활에 대한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메이스는 1951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신인상을 받았다. 1952년 5월29일, 시즌 개막 후 34경기를 소화한 메이스는 미 육군에 징집됐다. 그때 메이스가 한 인터뷰 기록을 보면 "군대에 관심이 없다. 하지만 가야한다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메이스는 홀어머니와 9남매를 부양해야 하는 이유로 징집에서 빠져 나오려 했으나 거부당했다. 복무 기간 대부분을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는 미 육군 야구팀에서 뛰었다. 1953년 시즌까지 약 260경기를 메이저리그에서 뛰지 못했던 메이스는 생전에 2년간의 공백기간이 없었다면 베이브 루스의 홈런 기록을 깰 수 있었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명예의 전당 헌액된 컵스의 전설 어니 뱅크스

어니 뱅크스는 1977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시카고 컵스 레전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흑인리그팀인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에서 먼저 활약을 하던 중 1951년 미국 육군에 징집됐다. 한국에 직접 참전은 하지 않았고 독일에서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뱅크스는 1953년 전쟁이 끝나고 제대하자마자 다시 캔자스시티로 복귀해 타율 0.347을 기록했다.

뱅크스는 같은해 시즌이 끝날 무렵인 9월 시카고 컵스에 데뷔함녀서 컵스 구단 역사상 첫 흑인 선수가 된다. 뱅크스는 1958년 리그 최다인 47홈런을 치며 내셔널리그 MVP에 선정됐다. 1959년에는 타점에서 리그 최다(143타점)를 기록하며 같은 상을 받았다. 19시즌을 컵스에 활약한 뒤 은퇴한 뱅크스는 컵스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격수로 꼽힌다.

◆그밖의 한국전 참전 선수들

제리 콜먼은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인물이다. 1949년 뉴욕 양키스에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콜먼은 4차례 월드시리즈 우승과 올스타에 선정된 인물. 1952년과 1953년 한국전에 직접 참전한 뒤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메이저리그 통산 성적은 0.263에 16홈런 218타점에 그쳤다. 은퇴 후 야구 해설자로 활약하다 2014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봅 네이버스는 1939년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소속으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7경기 뛴 것이 전부지다.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공군에 자원입대했고 한국전에 참전했지만 1952년 8월 8일 전투기를 타고 적진을 공격하기 위해 출격하다 한반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국전에 참전한 메이저리거 중 유일한 전사자로 기록돼 있는 네이버스는 북한 지역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돼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6.25기간 중 군대에 징집된 메이저리거는 총 413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명복을 빈다.

스포티비뉴스=양지웅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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