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수로 전향한 하재훈은 '가족'이라는 강력한 동기부여와 함께 앞으로 나아 가고 있다 ⓒSK와이번스
[스포티비뉴스=김태우 기자] 눈앞에는 계약서가 있었다. 새 출발을 위한 첫 사인을 해야 했다. 하지만 하재훈(29·SK)은 잠시 망설였다. “투수 전향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라는 고민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펜을 든 하재훈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고민하고 있었다.

하재훈은 미국에 있던 시절 투수보다는 야수로 더 성공한 선수였다. 야수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트리플A까지 갔다. 비록 메이저리그(MLB) 데뷔라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야수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투수로 선수 생활을 한다는 게 마냥 어색했다. 하지만 SK는 요지부동이었다. 하재훈을 야수로 보지 않았다. 장기적으로는 마무리로 키울 생각이었다. 구단도 양보는 없었다.

그때 하재훈의 머릿속에는 스쳐 지나간 게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이었다. 가족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무조건 KBO리그에서 성공해야 했다. 그러자 “야수보다는 투수로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는 구단의 말에 귀가 열렸다. 어렵게 펜을 들어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제야 이름 앞에 공식적으로 ‘투수’라는 단어가 붙었다. 새 인생의 시작이었다.

힘들었던 미국 생활, “나만 힘들었던 게 아니었다”

하재훈은 해외 유턴파 출신이다. 고교 시절 큰 잠재력이 모두의 관심을 모았다. 큰 잠재력만큼 꿈도 컸다. MLB에 도전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넜다. 하지만 어린 시절 미국에 간 선수들이 대개 그렇듯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다. 누구 하나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이 포커페이스의 사나이는, “외로움을 많이 탔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런 하재훈은 미국에서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했다. 인생의 든든한 동반자가 생겼다. 아내는 남편의 성공을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동반자도 덩달아 힘든 일상을 공유해야 했다. 아내도 미국 생활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언어 장벽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내는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가장 불편했던 이는 그런 아내를 보는 하재훈이었다.

하재훈은 첫 아이의 출산 과정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하재훈은 “어린 나이에 결혼했고, 첫 아이가 미국에서 태어났다. 출산 과정에서 통역도 없이 병원을 왔다 갔다 했다. 영어도 잘하지 못하던 시기였다”고 떠올렸다. 야구장에서는 쓰는 영어가 한정되어 있지만, 병원은 달랐다. 첫 아이를 얻었다는 기쁨은 물론, 이국에서의 설움이 뒤범벅된 눈물을 흘렸다. 하재훈은 아직도 그 미안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하재훈은 가장 큰 동기부여로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가족’을 뽑는다. 하재훈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동기부여는 가족이다. 아내와 아이도 외국에 왔다 갔다 하며 힘들었다. 나만 외로운 게 아니었다. 다 같이 외로웠다. 반드시 성공해 그걸 보상해주고 싶다”고 했다. 한 번 목표가 잡히자 저돌적으로 파고들었다. 하재훈의 지난겨울은, 어쩌면 가장의 처절한 생존 싸움이었다.

▲ 강력한 구위를 자랑하는 하재훈은 18경기 연속 무실점을 기록하는 등 리그 최고 불펜투수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SK와이번스
“아빠는 언제 나와?”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죽도록 훈련했다. 퓨처스팀(2군) 코칭스태프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가고시마 마무리캠프부터 12월까지 공을 던지고 또 던졌다. 코칭스태프가 내준 과제를 모두 해냈다. 지금껏 쓰지 않았던 근육이 욱신거렸다. 그래도 하재훈은 멈출 수 없었다. 비활동기간에도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 과정을 모두 거친 하재훈은 플로리다 캠프에서는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되어 있었다. 최고 155㎞의 강속구가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족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재훈은 지난해 계약 후 야구장을 처음 방문했을 때를 잊지 않는다. 이제 6살이 된 하재훈의 큰아들은 한국에서는 처음 보는 야구장에 신이 났다. 그러면서 “아빠는 이제 언제 나와?”라고 물었다. 툭 던진 한마디가 하재훈의 가슴을 울렸다. 1군에서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빠의 투구를 보여주고 싶었다. 부끄럽지 않은 아빠, 그리고 남편이 되고 싶었다. 돈보다 강력한 그 동기부여는 지금도 하재훈을 이끄는 원동력이다.

그 질문을 받은 지 6개월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이제 아들은 더 아빠에게 “언제 나와?”라고 묻지 않을 법하다. 팀이 이기고 있는 9회가 아빠의 무대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개막 엔트리에 합류한 하재훈은 중간계투를 거쳐 이제는 팀의 수호신으로 승격했다. 강력한 구위와 든든한 심장은 왜 SK가 하재훈을 마무리로 생각했는지를 증명한다. 오히려 구단이 걸었던 기대 이상의 활약이다.

하재훈은 21일까지 23경기에 나가 22이닝을 던지며 4승1패7세이브3홀드 평균자책점 1.64라는 뛰어난 성적을 냈다. 시즌 초반 경기력에 다소 기복이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자리가 잡혔다. 하재훈은 4월 3일 인천 롯데전에서 실점한 뒤 18경기에서 17⅓이닝을 던지며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았다. 18경기 연속 무실점은 올 시즌 리그 전체를 통틀어 최고 기록이다.

이 기간 탈삼진은 23개를 기록한 반면, 안타는 9개밖에 맞지 않았다. 팬들의 박수도 더 커지고 있다. “하재훈이 나오면 이긴다”는 믿음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팬들의 느낌은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통계전문사이트 ‘스탯티즈’의 집계에 따르면, 하재훈은 어느덧 리그 불펜투수 중 가장 좋은 대체선수대비 승리기여도(WAR)를 기록하고 있다. 리그를 대표하는 쟁쟁한 불펜투수들에 뒤지지 않는 팀 공헌도다.

하재훈은 “아이가 집에서 엄마와 같이 TV로 야구를 본다”면서 “한국에 와서 생활에 많이 안정이 생겼다”고 아빠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10년 전 MLB에서의 성공이라는 개인적 꿈을 품은 하재훈은, 이제 가족과 함께 꿈을 꾼다. 그간 잘해주지 못했던 아내에게 자랑스러운 남편, 그리고 이제는 둘이 된 아이들의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는 게 하재훈의 꿈이다.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하지만, 그래서 변하지 않는 가치는 더 따뜻하다.

스포티비뉴스=김태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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