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이재국 기자] BK 김병현(40). 그의 인생은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는 '프리즈비 슬라이더' 같았다. 성균관대를 중퇴하고 1999년 1월에 메이저리그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계약을 했다는 사실도, 그 계약금이 지금도 깨지지 않는 한국인 역대 최고 225만 달러라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미국에 가자마자 두 달 만에 더블A와 트리플A를 초토화한 뒤 초고속으로 메이저리그에 승격한 사실도 충격이었다. 5월 30일 빅리그 데뷔전에서 8-7로 앞선 9회말 등판해 뉴욕 메츠 중심타선인 에두아르도 알폰소-존 올러루드-마이크 피아자를 순식간에 돌려세우며 경기를 마무리한 것은 지금도 우리의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 명장면으로 남아있다.

▲ BK 김병현 ⓒ한희재 기자
동양에서 온 키 작은 잠수함투수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마구'를 던지며 메이저리그 최고 타자들의 방망이를 무력화하는 모습에 한국인도 미국인도 열광했다. 빅리그에서도 최정상 클로저로 자리 잡으며 우리의 가슴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던 그는 2001년 월드시리즈에서는 홈런을 맞고 주저앉아 우리의 마음을 애태우게 하기도 했다. 2003년 보스턴 레드삭스로 트레이드돼 놀라게 했고, 갑자기 선발 전환을 요구해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2개나 보유하는 전설을 썼지만, 이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행보를 보였다. 미국 독립리그로 날아가기도 했고, 일본으로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2016년 KIA에서 방출(자유계약선수)로 나온 뒤에는 도미니카공화국과 호주까지 가서 홀로 구도자처럼 야구의 답을 찾으려 애썼다.

때론 '직구'처럼 직선적이었고, 때론 '업슛'처럼 솟아올랐다. 때론 '프리즈비 슬라이더'처럼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이제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었던 그 기나긴 여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한국인 1세대 메이저리거로서 숱한 전설을 써내려온 '한국형 핵잠수함'의 엔진을 껐다. 비로소 은퇴를 결심한 BK 김병현. 그와 마주 앉아 마침표를 찍은 야구인생을 더듬어 봤다.

▲ 은퇴한 김병현이 SPOTV 스포츠타임 인터뷰에 출연해 자신을 소개하는 스포티비뉴스 이재국 기자 뒤로 돌아가 장난스럽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는 2006년 WBC 때도 중계방송 캐스터와 해설자 뒤로 불쑥 얼굴을 내밀어 웃음을 선사한 바 있다. ⓒ한희재 기자
#1. 은퇴

-호주에서 돌아와서 어떻게 지내고 있나?

"아이들 보면서 잘 지내고 있다."

-2016년 KIA에서 나올 때 다들 은퇴를 예상했지만, 본인 입으로는 한 번도 은퇴를 언급하지 않았다.

"하하하. 스스로 궁금한 게 있어서 도저히 못 그만두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번에 호주에 가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 '(나를) 원하는 데가 없으면 그만둬도 잠은 잘 잘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더 (야구를) 하고는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깔끔하게 그만둘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김병현이 찾고 있던 답은 어떤 것이었나?

"미국 가서 몸의 변화, 내가 가지고 있던 장점들이 없어지면서 계속 고민을 좀 많이 했던 것 같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내 기량이 나오지 않았고, 많은 분들이 실망도 하셨겠지만 가장 실망한 사람은 나였다. 그 답을 어느 정도 찾았다. '차라리 지금 한국에서 던졌으면 더 좋았을 걸'이라는 개인적인 아쉬움? 아직 그런 건 있다."

-호주에서 다시 예전의 감각을 찾았다고 했는데, 야구를 그만두기는 아쉽지 않은가?

"그렇다. 근데 선동열 감독님처럼 (정상에서) 멋있게 은퇴도 안 되고, 내 공도 못 찾고 그만두면…. 내 느낌이라도 찾고 그만두자라는 생각을 혼자서 하고 있었다. 은퇴할 타이밍은 놓쳤고, 속으로 '그만두더라도 원하는 건 하나라도, 조그마한 거라도 하고 그만둬야하지 않냐?' 생각해서 도미니카공화국도 갔던 거고, 호주야구도 갔던 거고. 근데 조금은 만족은 해서 그만둬도 뭐 괜찮다."

#2. 1세대 코리안 메이저리거

-1999년 애리조나와 계약을 맺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당시 계약금이 225만 달러, 역대 한국인 최고 금액인데 그 기록이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돈은 내가 받은 게 아니고 부모님이 받으셨고(웃음), 그냥 우리집이 걱정없이 살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당시 뉴욕 메츠도 갈 수 있고, 애리조나도 갈 수 있고, 여러 구단의 제안이 있었는데 애리조나를 선택한 이유는?

"그 당시에 나한테는 권한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애리조나나 뉴욕이나 어떻게 다른 건지도 잘 몰랐을 때고, 그냥 액수가 애리조나가 훨씬 많아서 애리조나를 택했던 것 같다. 다행히 또 그때 환율이 두 배 되는 덕분에(웃음)."

-재테크에 성공했다.

"그렇다. 감사하다.(웃음)"

-애리조나에 입단하자마자 더블A-트리플A-메이저리그까지 초고속 승격이 됐는데?

"신생팀이어서 그랬던 것 같고, 투수들이 많이 없어서 운이 좋게 그렇게 된 것 같다. 그때 얼떨결에 던졌던 것 같다. 얼떨결에(웃음)."

-ML 데뷔전(1999년 5월 30일)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뉴욕 메츠의 마이크 피아자를 삼진 잡는 장면은 아직도 많은 팬들의 기억에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다.

"더블A에서는 중간투수, 마무리투수를 했었고, 트리플A에서 한 달 선발투수를 했었다. 그래서 나는 '아, 선발투수를 시키려나 보다' 생각했다. 그때(데뷔전이) 뉴욕 메츠전이었을 거다. 서 있는데 감독님(벅 쇼월터)이 가서 몸 풀라고 해서 '어? 설마 던지나?' 했다. 그냥 어떨 결에 나간 거다."

-그렇게 마무리를 하고 한 손을 번쩍 들고 내려왔는데.

"손은 들었던 것 같더라. 왜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기분이 좋아서 들었겠지."

-그렇지만 선발로 가야하는데 그 때문에 마무리로 굳어지는 계기가 됐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는 선발이 하고 싶었다. 그런데 팀 사정이 그렇게 되니까 계속 마무리를 하고…. 처음부터 마무리는 아니었고 중간에서 던졌다. 그때 잘 던지니까 '오~ 잘 던지네. 너 계속 던져' 그래서 그냥 던진 건데, (마무리로) 못 던졌으면 '얘는 선발체질이구나' 그랬을 텐데, 내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웃음)"

-'그냥 마무리투수로 계속 갔으면 전설적인 기록을 썼을 텐데, 도대체 왜 선발을 고집해서 기록이 중단되게 했을까'라며 아쉬워하는 분들이 많다.

"근데, 하~. 인생은 아무도 모른다. 내가 마무리를 계속 했어도 잘 할 수 있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 안 한다. 그냥 1이닝씩 던졌으면 대접 받으면서 야구를 하고 있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긴 한다. 근데 나는 좀 항상 잘 하는 것보다 남들이 ‘안 된다'라고, '너 이거 못해'라고 하면 더 하고 싶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웃음)"

-랜디 존슨이 당시 김병현 선수를 두고 "삼진 잡는 능력은 나보다 뛰어나다"라고 이런 얘기를 했는데?

"아, 했다고 하더라. 잠깐 (삼진을) 많이 잡았던 적은 있는 것 같다. 근데 나는 1이닝을 던지는 투수였고, 1이닝으로 전력투구를 하면 삼진을 더 많이 잡을 수는 있다. 랜디 존슨은 선발투수였기 때문에 마무리투수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당시 '프리즈비 슬라이더(Frisbee Slider)'와 '업슛(Up shoot)'을 결정구로 던졌다. 프리즈비(플라스틱 원반) 슬라이더는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는 구종이었다. 좌타자가 헛스윙을 하는데 공이 몸에 맞을 정도로 날카롭게 휘어 들어갔다. 프리즈비 슬라이더는 어떻게 던졌나.

"이렇게 잡고(그립을 보여주며) 보통 슬라이더와 똑같은 건데…. 근데 난 끝하고 끝을 잘 이용했던 것 같다. 손가락 반동을 이용해서 이렇게, 약간 움직이면서 던졌다."

-슬라이더는?

"슬라이더도 비슷한데, 옆으로 던질 때하고 밑에서 위로 던질 때하고 다르다."

-솟아오르는 업슛은?

"떠오르는 건 굉장히 힘들다. 업슛을 던지려고 하면 그만큼 밑으로 내려가야 하니까. 밑으로 던지는 친구들한테는 굉장히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는데, 요즘 그걸 던지는 친구들이 별로 없더라."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메이저리그 양대리그에서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받은 기록을 가지고 있다.

"내가 우스갯소리로 '원 겟 원 플(One Get One Plus)'이라고 하는데, 대형마트에 가면 흔히 말하는 1+1과 같은 것이다. 한 개 사면 한 개 덤으로 주는…. 쇳복이 좀 있었나보다. 보스턴 시절 전반기까지 선발투수를 했었는데, 꽤 괜찮았던 것 같다. 방어율(평균자책점)도 3점대 초반이었고. 그때는 팀에 대한 공헌도가 많았고, 그러고 나서 테오 엡스타인 단장이 2년 계약을 해줬고, 그만큼 나를 믿었었던 거고. 근데 그해 겨울에 모든 내 야구인생의 변환점이 많이 왔었다. 잘못된 운동, 부상, 그러면서 그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②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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