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이 요르단을 꺾고 월드컵 본선 진출 티켓을 따냈다. ⓒ대한민국농구협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아버지가 세운 기록에 아들이 도전하는 흔치 않은 일이 이뤄지게 됐다.

한국은 2일 부산 사직체육관에서 열린 2019년 FIBA(국제농구연맹) 월드컵 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2라운드 E조 10차전 요르단과 홈경기에서 88-67로 이겼다.

한국은 이날 승리로 8승 2패를 기록해 뉴질랜드(9승 1패)에 이어 조 2위를 지켰다. 한국은 2019년 2월 22일 시리아, 25일 레바논과 두 차례 원정 경기에 모두 져도 2019년 중국에서 열리는 월드컵 본선에 오른다. 2014년 스페인 대회 이후 2회 연속 출전이다.

중국 대회는 내년 8월 31일부터 9월 15일까지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난징 우한 등 8개 도시에서 열린다. 32개국이 8개 조로 나뉘어 조별 리그를 벌인 뒤 각조 1, 2위가 2라운드에 올라 4개국씩 4개 조로 2라운드를 펼친 뒤 각조 1, 2위가 8강 녹아웃 스테이지에서 우승을 겨룬다.

라건아가 합류한 한국은 2019년 중국 대회 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1라운드 A조에서 직전 대회 16강 진출국인 뉴질랜드와 1승 1패(86-80, 84-93)를 주고받았다.

뉴질랜드는 2014년 스페인 대회 조별 리그 C조에서 우크라이나와 핀란드를 제치고 미국, 터키, 도미니카공화국에 이어 조 4위로 16강이 겨루는 녹아웃 스테이지에 올랐으나 대회 4강국인 강호 리투아니아에 71-76으로 져 탈락했다.

이런 경기 결과를 바탕으로 내년 중국 대회에서 한국의 선전을 기대해 볼 만하다.

1970년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제6회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FIBA 월드컵 전신)에 처음으로 나선 한국은 이후,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1978년 제8회 대회(필리핀), 1986년 제10회 대회(스페인), 1990년 제11회 대회(아르헨티나), 1994년 제12회 대회(캐나다)에 꾸준히 출전했다. 한국은 1998년 대회(그리스)를 끝으로 지역 예선을 통과하지 못하다가 16년 만인 2014년 대회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키, 즉 골 밑 장악력이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종목 특성 때문에 아시아 나라가 세계선수권대회나 올림픽 같은 세계 규모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가운데 힘 세고 골 밑 장악력이 큰 라건아의 합류는 한국 남자 농구에 한 줄기 빛과 같다.

오래전 일이기는 하지만 1954년 브라질에서 열린 제2회 대회에서 12개국 출전국 가운데 필리핀이 미국 브라질에 이어 3위, 대만이 5위, 이스라엘이 8위를 했고 1959년 제3회 대회(칠레)에서는 대만이 4위, 필리핀 8위를 기록했다. 필리핀은 자국에서 열린 1978년 제8회 대회에서 한번 더 8위를 차지했다.

이 대회 이후 2018년 현재 아시아 나라 가운데 FIBA 월드컵 8위에 오른 팀은 1994년 캐나다에서 열린 제12회 대회 중국이 유일하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13위를 했다. 

한국은 2014년 스페인 대회까지 7차례 본선에 나섰지만 첫 출전한 1970년 대회 11위가 지금까지 최고 성적이다.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10위권 밖이었고 1998년 대회에서는 출전 16개국 가운데 꼴찌였다.

한국이 FIBA 월드컵 출전 사상 가장 좋은 성적을 올린 1970년 대회 대표 팀 코치가 한국을 2019년 중국 대회 본선으로 이끈 김상식 감독의 아버지인 김영기 전 KBL(한국농구연맹) 총재다.

1970년 대회 대표 팀은 *감독=강재권 *코치=김영기 *선수=김영일 김인건 이인표 신동파 신현수 이병국 최종규 박한 윤정근 곽현채 유희형 추헌근이다. 신세대 농구 팬들도 한번쯤 들어 봤을 이름이 여럿 있다.

보직은 코치였지만 당시 대표 팀은 대표 선수들 큰형뻘인 김영기 전 KBL 총재가 이끌고 있었다.

그렇다면 1970년대 한국 남자 농구 현황은 어땠을까.

1960년 마닐라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FIBA 아시아 컵 전신)에서 4위를 기록한 이후 2~3위를 오르내리던 한국은 1969년 방콕에서 벌어진 제5회 대회에서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한국은 9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풀리그로 진행된 이 대회에서 말레이시아 홍콩 파키스탄 등을 가볍게 물리친 뒤 홈 텃세가 유난스러운 태국을 93-92로 따돌려 3년 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있었던 경기장 폭력 사태에 따른 패배를 설욕했고 이어 사실상의 결승인 필리핀전에서 신동파가 50점을 쏟아붓는 대활약에 힘입어 95-89로 이겨 대회 사상 처음으로 우승했다.

한국이 FIBA 월드컵 출전 사상 가장 좋은 순위를 기록하는 발판이 된 우승이었다.

한국 남자 농구가 아시아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이 미국 본고장 농구를 한국에 옮겨 놓은 미군 장교들이다.

농구 올드 팬 가운데에는 남자 농구 대표 팀이 서울 용산에 있는 미 8군 체육관에서 미군과 친선경기를 하는 장면을 TV로 본 적이 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16개 출전국 가운데 꼴찌로 참패한 19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한국 남자 농구에 축구의 거스 히딩크 같은 인물이 나타났다.

1965년 국가 대표 팀 코치를 맡은 미 제8군 소속 찰스 마콘 소위다. 미 제8군 사령부가 대한농구협회에 코치로 추천한 마콘 소위는 미국 대학 농구 데비이슨 칼리지의 주전 가드 출신이었다. 와일드 캐츠란 별명을 갖고 있는 데이비슨 칼리지는 1964~65년 시즌을 앞두고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가 전미 대학 랭킹 1위로 꼽을 만큼 1960년대에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농구 본고장의 명문대 출신 젊은 장교는 열과 성을 다해 한국 남자 농구 대표 선수들의 훈련을 도왔다.

한국 농구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한 젊은 장교 마콘 소위가 1967년 임기를 마치고 한국을 떠나자 그의 자리를 제프 거스플 중위가 이어받았다. 거스플 중위는 페어레이 딕킨슨대학교에서 선수 생활을 한 ‘농구인’이었다.

이들의 노력과 함께 미 제8군은 1968년 1월 남자 농구 대표 팀의 미국~캐나다 원정을 지원했다. 이인표 신동파 김무현 김인건 유희형 박한 최종규 신현수 곽현채 김정훈은 미군이 제공한 군용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 본고장 농구를 익혔다. 북미 원정에 코치로 참가한 거스플 중위는 이후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 한국 선수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들이 한국 남자 농구 대표 팀을 지도하는 사이 열린 대회가 1966년 제5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다. 이 대회에서 국제 대회에서는 보기 드문 불상사가 일어났다.

홈 코트의 태국과 벌인 준결승에서 선수들끼리 시비가 붙자 일부 관중은 물론 경찰까지 가세한 난투극 끝에 경기 중단 당시 스코어로 승패를 가려 52-67로 져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이런 역사 속에 발전한 한국 농구가 귀화 외국인 선수 합류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이 배경에 부자(父子)로 이어지는 국가 대표 팀 지도자 계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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