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예식 KOC 전문 위원(가운데)이 올림픽 유치 신청서를 IOC 관계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90년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서울시가 올림픽 유치 계획을 발표한 지 18일 뒤인 1979년 10월 26일 제4공화국이 종말을 고했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이 터지면서 그동안 올림픽 유치 운동을 주도해 온 박종규도 정치, 사회적 혼란 속에서 체육회장직을 사퇴해 올림픽 유치 운동은 오리무중이 됐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정국의 혼미 속에 올림픽 유치 도시인 서울시는 물론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체육계도 올림픽 유치에 대한 회의론에 휘말렸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의 정부 또한 올림픽 유치에 미온적인 자세를 보였다. 

국내의 모든 상황이 어수선한 가운데 1980년 7월 14일 조상호 대한체육회 부회장이 박종규의 뒤를 이어 회장에 취임했고 서울시장도 박영수로 바뀌어 올림픽 유치와 관련된 주요 인사들도 재편성됐다. 뒤따라 정치적인 상황도 바뀌어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 시대가 막을 내리고 1980년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해 올림픽 유치 계획은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 

올림픽 유치 계획은 전임 대통령 결정 사항으로 사항의 중요성을 고려해 후임 대통령 결심을 받지 않을 수 없었기에 올림픽 유치 문제는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대한체육회는 우선 IOC의 올림픽 유치 신청서 마감일이 1980년 11월 30일인 것을 확인한 뒤 체육회의 의견을 재조정하기 위해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9월 29일 첫 회의를 가졌으나 아무런 결론을 못 내려 KOC(대한올림픽위원회) 확대 상임위원회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KOC는 11월 6일 긴급 확대상임위원회를 열어 서울 올림픽 유치의 타당성을 재확인하고 올림픽 유치 신청서를 IOC에 제출하도록 문교부에 건의했으며 이규호 문교부 장관은 KOC 결정에 동의했다.

그러나 KOC와 문교부의 이 같은 방침에도 유치 도시인 서울시는 모든 여건상 1988년 여름철 올림픽 개최는 불가능한 것으로 의견을 정리했고 문교부는 이를 종합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문교부 장관의 보고를 받은 전두환 대통령이 ‘전임 대통령이 국내외적으로 올림픽 유치를 공표한 마당에 특별한 사유 없이 이를 변경할 수 없을 뿐더러 역사적인 사업을 추진해 보지도 않은 채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유치 의사를 확고히 밝히자 문교부는 올림픽 유치 의사를 IOC에 통보하라고 KOC에 지시했다. 

정부의 올림픽 유치 계획을 재확인한 KOC는 1980년 12월 3일부터 인도 뉴델리에서 열리고 있는 AGF 총회에 참석 중인 조상호 위원장에게 정부 방침을 긴급하게 전달하는 한편 IOC 사무총장에게 "KOC는 1988년 여름철 올림픽 개최 후보 도시로 서울시를 지지하며 문서에 의한 신청서는 추후 제출 하겠다"고 알렸다.

이에 따라 IOC는 1980년 12월 4일 한국 서울시와 일본 나고야시가 1988년 여름철 올림픽의 유치 신청 도시가 됐다고 발표했다.

스위스 로잔에 있는 IOC 본부는 1980년 12월 5일 151쪽에 이르는 설문서를 KOC에 보내는 한편 서울시의 올림픽 유치 신청서 및 KOC의 서울시 지원 확인서 그리고 정부 책임자가 서명한 올림픽 유치 보증서를 제출하도록 요청했다. 이에 따라 문교부는 서울시, 대한체육회와 대책협의회를 갖고 유치 신청서 작성의 주관 부처와 합동작업반 편성 및 예산 확보 등 제반 문제를 검토했다.

애시당초 올림픽 유치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 서울시는 체육회와 합동작업반 구성에도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문교부 박성규 체육국장이 실무 작업반 총책임을 맡고 문교부와 서울시 사무관 1명씩을 KOC 전문위원실에 파견해 합동 근무하도록 절충안을 마련했다.

그럼에도 유치 도시인 서울시는 유치 신청서 작성에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해를 넘긴 1981년 1월 6일에야 KOC 주도로 서둘러 작업에 착수했고 시간에 쫓긴 KOC 실무반은 40여 일의 철야 작업 끝에 영문판 190쪽, 불문판 163쪽 등 방대한 설문 답변서를 제출 마감일을 불과 나흘 앞둔 1981년 2월 24일에야 완성할 수 있었다. 

KOC는 이 방대한 분량의 설문 답변서와 신청서를 우송할 경우 마감일까지 IOC 본부에 접수하지 못할 것으로 우려한 나머지 KOC와 서울시 실무자 3명이 이를 휴대하고 직접 제출하는 방법을 택했다. 1981년 2월 25일 서울을 떠나 26일 IOC 본부에 무사히 도착한 3명의 운송반은 주 제네바 한국 대표부 협조를 받아 차질 없이 제반 서류를 제출했다. 

경쟁 도시인 나고야는 한국보다 1시간 앞서 유치 신청서를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으며 유치 신청서는 양적인 면에서 한국의 3분의 1 수준이고 한국에 비해 내용도 부실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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