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8년 서울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82kg급 한명우는 결승에서 터키의 네스미 겐칼프와 맞서 눈썹 위가 찢어지는 부상으로 붕대를 감고 경기를 치르는 투혼을 펼친 끝에 꿈에도 그리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한체육회 90년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81년 9월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서울이 1988년 여름철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각 경기 단체였다. 주최국으로서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경기 단체별로 서울 올림픽에 대비한 유망주들을 뽑아 경기력 향상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당시 ‘꿈나무’들 연령대를 보면 서울 올림픽뿐만 아니라 단기적으로는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장기적으로는 서울 올림픽 이후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한국 스포츠는 이렇게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었다. 한국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금메달 6개와 은메달 6개, 동메달 7개로 종합 10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 대회는 스포츠 강국인 옛 소련 등 동유럽 나라들이 대거 불참한 '반쪽 대회'여서 진정한 한국 스포츠의 실력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서울 올림픽이야 말로 한국이 스포츠 선진국으로 가는 분기점이 됐다.

서울 올림픽에서는 IOC 회원국 가운데 북한 쿠바 알바니아 에티오피아 마다가스카르 세이셸 니카라과 등 7개국을 뺀 159개국 8,391명 선수들이 23개 정식 종목과 3개 시범 종목, 2개 전시 종목에 걸쳐 16일 동안 기량을 겨뤘다. 아루바, 몰디브 등 8개국은 서울 대회가 올림픽 데뷔 무대였다.

237개 세부 종목에서 메달을 다툰 스포츠 강국들의 치열한 싸움에서 소련은 금메달 55개와 은메달 31개, 동메달 46개로 여유 있게 종합 순위 1위를 차지했고 동독(금 37 은 35 동 30)은 1976년 몬트리올 대회 이후 다시 한번 미국(금 36 은 31 동 27)을 따돌리고 2위에 올라 동독 스포츠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한국은 금메달 12개와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스포츠 강국 서독(금 11 은 14 동 15)을 제치고 4위에 올랐다. 한국은 올림픽을 무대로 삼아 겨룬 아시아 3강 경쟁에서 중국(금 5 은 1 동 12)과 일본(금 4 은 3 동 7)에 여유 있게 앞섰다.

올림픽의 경우 홈그라운드에서 열린다고 무조건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종합 3위(금 16 은 5 동 8)에 올랐지만 캐나다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 없이 은메달 5개와 동메달 6개로 종합 27위에 그쳤다.

한국은 단순히 주최국 이점만으로 호성적을 거둔 게 아니었다. 그리고 한국이 거둔 33개의 메달은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고 각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직전 대회인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여자부 개인전에서 고교생 서향순이 금메달, 1979년 서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 전관왕 김진호가 동메달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올림픽 무대에 데뷔한 양궁은 남녀 단체전과 남녀 개인전 등 4개 세부 종목 가운데 남자 개인전을 뺀 3개 종목에서 금메달을 휩쓸었고 은메달 2개와 동메달 1개 등 모두 6개 메달로 한국이 세계 4강에 오르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김수녕은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모두 금과녁을 명중해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2관왕이 됐다. 여자 개인전에서는 김수녕과 왕희경, 윤영숙이 1위~3위를 휩쓸었다. 전인수와 이한섭, 박성수가 나선 남자 단체전에서는 강호 미국을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박성수는 개인전에서 은메달을 보탰다.

양궁 종목이 열린 태릉 육군사관학교 경기장에서는 쉴 새 없이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김수녕은 이후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단체전 금메달과 개인전 은메달, 2000년 시드니 대회 단체전 금메달과 개인전 동메달을 추가해 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와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기록하며 ‘신궁’의 칭호를 얻었다. 김수녕은 2018년 현재 사격 진종오(금 4 은 2)와 함께 가장 많은 올림픽 메달을 획득한 한국 선수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차영철은 소구경 소총 복사에서 702.8점을 쏴 옛 체코슬로바키아의 미로슬라브 바르가(703.9점)에 이어 은메달을 차지해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사격 종목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됐다. 사격은 정책 종목으로 소수 정예 주의를 유지하던 때인 1972년 뮌헨 올림픽 등에 무리하게 선수단에 합류했으나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해 다른 종목 관계자들 눈총을 받다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효자 종목으로 발돋움하게 됐다.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발굴한 전병관은 역도 52kg급에서 합계 260kg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은메달을 들어 올렸다. 한국의 올림픽 첫 역도 은메달이었다. 전병관은 당시 세계 기록을 갖고 있던 중국의 허조우지앙을 2.5kg 차로 따돌렸다.

82.5kg급 이형근은 합계 367.5kg으로 동메달을 보탰다. 두 선수의 메달은 1956년 멜버른 대회 라이트급 김창희 동메달 이후 32년 만에 역도에서 나온 올림픽 메달이었다.

박종훈은 남자 뜀틀에서 19.775점의 연기를 펼치며 중국의 로우윤(19.875)과 동독의 실비오 크롤(19.862)에 이어 동메달을 땄다. 체조는 1960년 로마 대회(김상국 유명자)에 처음 나선 이후 28년 만에 첫 올림픽 메달의 꿈을 이뤘다.

국제 종합 경기 대회마다 한국 선수단에 묵직한 메달 꾸러미를 안기던 레슬링과 유도, 복싱 격투기 3형제는 서울 올림픽에서도 변함없이 효자 노릇을 했다.

레슬링은 금메달 2개와 은메달 2개 그리고 동메달 3개, 유도는 금메달 2개와 동메달 1개, 복싱은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로 '격투기 3형제'가 합쳐 금메달 6개와 은메달 3개, 동메달 5개를 획득했다.

금메달은 전체 12개의 50%를 차지했고 금, 은, 동을 합친 메달은 전체 33개의 42%에 이르렀다. 모든 종목이 그렇지만 특히 정신력이 중요한 격투기 종목의 호성적은 서울 올림픽에 나선 국가 대표 선수들의 자세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결과였다.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74kg급에 나선 김영남은 예선 4차전까지 전승 가도를 달렸으나 5차전에서 폴란드의 요제 트라츠와 연장 접전 끝에 함께 실격되면서 자력으로 결승 진출이 어려웠으나 트라츠가 김영남과 조 1위를 다투던 불가리아의 보리슬라브 벨리츠코프를 판정으로 눌러 결승에 올랐다.

김영남은 결승에서 소련의 다울렛 투르하노프에게 먼저 1점을 내줬으나 목감아돌리기로 2점을 뽑아 역전하며 한국 선수단에 대회 첫 번째 금메달을 안겼다. 김영남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메달 일보 직전인 4위에 그친 아쉬움을 금메달로 날려 버렸다.

68kg급 김성문은 결승에서 소련의 레본 둘팔라키안에게 0-3으로 져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52kg급 이재석과 62kg급 안대현, 82kg급 김상규는 각각 동메달을 획득했다.

자유형 82kg급 한명우는 6전 전승으로 조 예선을 통과한 뒤 결승에서 터키의 네스미 겐칼프와 맞서 눈썹 위가 찢어지는 부상으로 붕대를 감고 경기를 치르는 투혼을 펼치며 4-0으로 이겨 레슬링에서 두 번째 금메달을 획득했다. 한명우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6위에 머문 아픔을 단숨에 씻었다. 한명우는 이때 32살로 레슬링 선수로는 많은 나이였고 두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68kg급 박장순은 결승에서 소련의 아르센 파제프에게 0-6으로 져 은메달을 차지했다. 박장순은 다음 대회인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74kg급으로 체급을 올려 금메달 꿈을 이뤘다. 57kg급 노경선과 90kg급 김태우는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저작권자 © SPOTV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