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 야구 30주년 기념 올스타 레전드 화보에서 장효조 전 삼성 2군 감독이 활짝 웃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 친다’ 원조 장효조, 그의 선수 시절은 어땠을까(5·끝)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82년 시즌 막판 김재박이 MBC 청룡에 입단한 것을 시작으로 장효조를 비롯한 서울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가 대거 프로에 데뷔했다. 장효조의 실력은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옷을 바꿔 입었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고향 팀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한 장효조는 프로 첫해 경기당 1.27개의 놀라운 안타 생산력을 발휘하며 3할6푼9리(317타수 117안타)의 높은 타율로 가볍게 타율 1위에 올랐다. 최다 안타도 1위였다. 이후 장효조는 삼성이 전·후기 통합 우승을 한 1985년부터 1987년까지 3년 연속 타율 1위를 하는 등 1988년까지 삼성에 있는 동안 통산 4차례 타격왕에 올랐다.

1988년 1월 23일 아침 신문을 본 야구 팬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포츠서울'은 이날 자 서울판에서 삼성 장효조가 트레이드 시장에 나왔다고 보도했다. 1982년 프로 야구 출범 이후 최대 특종이 터진 것이다.

특종이 터지기 전날 '스포츠서울' 삼성 구단 출입 기자는 평소대로 남대문 근처에 있는 삼성 구단 서울 사무소에 별 생각 없이 들렀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 전 장효조는 연봉 협상을 위해 구단 사무소에서 들렀다가 구단 관계자에게 "갈 곳을 알아보라"는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전년도 시즌 MVP에게 트레이드 방침을 통보한 것이다.

삼성 구단 관계자는 장효조에 뒤이어 들어온 '스포츠서울' 기자가 관련 내용을 알고 있는 것으로 지레짐작했다. 이후 구단 관계자들과 저녁 식사 자리가 이어졌고 자연스레 장효조 관련 얘기가 나왔다. 물론 '스포츠서울' 기자는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특종은 이렇게 엉뚱하게 나오는 경우가 꽤 있다.

삼성 구단은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 1984년 롯데를 한국시리즈 상대로 골랐으나 3승4패로 진 삼성은 1985년에는 아예 한국시리즈를 없애 버렸으나 포스트시즌 방식이 바뀐 1986년,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해태에 잇따라 패권을 내줬다. 삼성 그룹의 치밀한 감사 결과 해답은 하나, "최동원이나 선동열처럼 한국시리즈 같은 큰 무대에서 활약할 만한 투수를 영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종 보도가 나가기 전부터 삼성 구단의 고위 관계자는 장효조 트레이드를 다른 구단 관계자들에게 타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결같이 "설마 실제로 팀의 간판 선수를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겠느냐"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트레이드가 요즘처럼 활성화돼 있지 않았다.

삼성은 '스포츠서울'의 특종 보도 이튿날 장효조를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는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거물 장효조와 맞바꿀 상대가 국내 리그에 있을 리 없었다. 교환 상대가 투수라면 최소한 시즌 15승 이상을 올리는 투수여야 하는데 그런 투수를 내줄 배짱 있는 구단은 없었다. 현금 트레이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구단은 현금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삼성으로서는 속이 뒤집힐 일이었다.

마땅한 트레이드 카드도 없고 장효조 측 인사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진통 끝에 장효조 트레이드 건은 일단 물밑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한번 터진 봇물은 언젠가는 다시 터지는 법. 결국 장효조는 그해 12월 20일 롯데 김용철과 맞트레이드 됐다. 이 트레이드에는 삼성 투수 장태수와 롯데 투수 이문한의 교환도 끼어 있었다. 이에 앞서 두 구단은 김시진 등 4명과 최동원 등 3명을 맞바꾸는, 프로 야구 출범 이후 최대 규모의 트레이드를 성사했다.

1980년대만 해도 트레이드는 쫓겨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트레이드 될 때 장효조의 나이 우리나라 나이로 33살이었고 당시 분위기도 그랬지만 장효조는 새로운 구단인 롯데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30대 후반이자 프로 야구 선수로 맞은 마지막 시즌인 1992년 8월 13일 장효조는 사직 구장 쌍방울전에서 최소 타석(3,606) 1,000안타 기록을 세웠다. 타격의 달인다운 자세를 잃지 않은 장효조는 이후 9안타를 추가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누구는 장효조를 '예측 타격'의 1인자였다고 한다. 이 말에는 노력보다는 타고난 재능이 장효조의 타격 실력에 도움이 됐다는 뜻이 들어 있다. 그러나 장효조는 노력형 선수였다. 누구보다 많은 스윙을 했고 누구보다 많이 뛰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추어 시절 이후 오랜 기간 3할대 타율을 기록할 수 없었다.

장효조는 은퇴한 뒤 마지막으로 몸담았던 롯데 타격 코치를 시작으로 친정 팀인 삼성 타격 코치와 스카우트 등으로 일했으며 삼성 2군 감독으로 후진 양성에 정열을 불태웠다. 2011년 KBO가 선정한 프로 야구 30년 레전드 올스타에 뽑히는 등 아마추어와 프로를 통틀어 한국 야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장효조는 해야 할 많은 일들을 후배들에게 맡기고 2011년 9월 7일 돌아오지 않을 먼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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