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가운데)이 지난 5일 축구회관에서 열린 출입 언론사 축구팀장 간담회에서 홍명보 전무(오른쪽)와 김판곤 국가대표감독선임위원장이 배석한 가운데 발언하고 있다. ⓒKFA


▲ 기성용(오른쪽 두번째), 김영권(왼쪽) 등 한국선수들이 지난달 18일 러시아 니즈니 노브고로드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스웨덴과 2018년 러시아월드컵 F조리그 1차전에서 0-1로 진 뒤 경기장에서 걸어 나오고 있다.

[스포티비뉴스=류재규 기자] 정몽규 회장과 홍명보 전무이사를 비롯한 대한축구협회 수뇌부가 2018년 러시아월드컵 결과를 두고 팬과 축구인들과는 크게 다른 인식을 드러내면서 축구협회의 공감과 소통 능력이 도마 위에 올랐다.

정 회장과 홍 전무는 지난 5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출입 언론사 축구팀장 간담회를 갖고 러시아월드컵에서 신태용 감독의 국가대표팀이 보여준 경기력을 비롯한 한국 축구 전체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정 회장은 이 자리에서 자신의 임기 중 치른 두차례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에서 잇따라 탈락해 실망한 팬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진솔한 사과, 납득할 만한 비전을 제시하는 대신 책임 회피로 일관하며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려고 했다. ‘혹시나하고 기대했던 팬의 마음을 더 깊은 불신으로 채웠다. 차라리 간담회를 열지 않는 편이 나을 뻔 했다.

정 회장은 대표팀의 선수 선발과 훈련은 적절했는지, 본선에 앞선 평가전 상대와 현지 캠프는 잘 선정한 것인지, 필승 상대로 꼽은 스웨덴전에서 무기력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16강에 오르기 위해 축구협회가 최선의 지원을 했는지, 앞으로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대책은 무엇인지 등 상식적인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국축구의 오랜 숙제이자 원론적인 과제를 나열하며 축구협회 수장의 무한책임을 비켜갔다.

이런 식이었다. “우리 선수들은 16강에 오를 기술이 부족하다. 기술축구를 하려면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 입학을 위한 성적에만 목을 매는 학원축구, 선수들의 해외 진출을 가로막는 병역 등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이런 사회현상을 축구협회가 해결하기엔 한계가 있다.”

“본선 조 추첨 뒤 다들 속으로 큰일났다고 생각하고 1승이라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해 대회가 시작되기도 전 자신이 먼저 꼬리를 내렸음도 실토했다.

홍 전무는 이번 월드컵 한국 경기의 지상파 3사 해설을 맡은 안정환(MBC), 이영표(KBS), 박지성(SBS) 위원이 일제히 축구협회와 대표팀에 쓴소리를 한 것에 대해 발언했는데, 이들의 진단에 공감한 팬의 반발을 불렀다.

해설자 세 분은 젊은 나이에 처음 나간 (2002년 한일)월드컵이 성공(4강 진출)하고, 다음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도 성공(16강 진출)하니 다른 사람이 못하는 것에 대해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 같다. 이들이 감독 경험을 해봤다면 더 깊은 해설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홍 전무는 2002년 월드컵 세대가 밖에서만 맴돌지 말고 축구협회를 비롯한 현장에 들어와 함께 일하자는 메시지를 부연했지만, 그의 발언을 접한 팬의 생각은 달랐다.

축구 팬이 정 회장의 말과 태도에서 느낀 것은 전략을 제시하고 성공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역동적인 행정가의 모습이 아니었다. ‘가능성에 도전하는 대신 한계를 절대시한 사람의 무기력한 현실 안주였다.

축구 팬들에게 홍 전무의 발언은 ‘원칙없이 기득권에 투항한 옛 영웅의 변명이나 현 체제에서는 뜻을 펼칠 수 없다고 보고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며 소신 발언을 하는 후배에게 훈계를 늘어놓는 선배의 꼰대질로 받아들여졌다.

▲ 홍명보 대한축구협회 전무(오른쪽)가 지난달 28일 2018년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를 마치고 귀국한 신태용 국가대표팀 감독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신들의 현재 위치와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든, 한국축구의 수장인 정 회장과 실무행정 책임자인 홍 전무는 선배 세대가 고난 속에서 키워온 축구의 달콤한 열매 맛을 본 수혜자다.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막중한 소명의식과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이다.

1990년대 초 K리그 현대 호랑이 축구단(현 울산현대) 단장으로 축구계와 공식적인 인연을 맺은 정몽규 회장은 현재 부산 아이파크의 오너이다. 사촌 형이자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정몽준 현 축구협회 명예회장, 자신의 직전 회장이었던 조중연 전 회장을 비롯한 축구인과 국민이 피땀으로 일군 자랑스럽고 든든한 축구 자산의 승계자다.

정 회장은 고장이 났거나 좌초된 배를 넘겨받은 선장이 아니다. 정 회장 직전의 한국축구는 사상 최고의 성과를 내고 있었다. 오늘의 한국축구를 오래 전 과거와 동일시하는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거나남의 일처럼 논평하고 넋두리를 해서는 곤란하다. 현재 축구 환경이 먼 옛날과 달라진 것이 없다고 실제로 생각한다면그건 6년째 축구협회를 이끌고 있는 자신의 지도력 한계, 그릇된 판단력과 일처리 방식 때문이라고 자성해야 한다.

홍 전무는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축구협회를 이끌었던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때부터 2002년 대회까지 태극마크를 달고 선수로서 4회 연속 월드컵 본선 무대를 경험했다. 긴 세월 한국축구에 기여한 헌신과 이를 통해 누린 영광, 2014년 브라질월드컵 대표팀 감독으로 겪은 뼈아픈 실패의 경험까지 녹여내 미래 세대를 위한 용광로에 쏟아야 하는 사람이다.

홍 전무가 각급 연령별 대표팀을 거쳐 2014년 브라질월드컵 대표팀 사령탑에 오르고, 축구협회 전무까지 초고속으로 경험하게 된 것은 자신의 노력과 역량에 더해 한국 축구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던 2002년 월드컵 세대의 맏형이자 대표주자라는 상징성도 적지않게 작용했다.

홍 전무는 이 상징성을 사유화하거나 독점하면 안 된다. 해설위원 세 명의 쓴소리에 대한 그의 공식석상 언급에 많은 팬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그의 삶에서 '권위의식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한다.

▲ 손흥민이 지난달 27일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독일과 2018년 러시아월드컵 F조리그 3차전 후반 추가시간 2-0 승리를 확정짓는 쐐기골을 터뜨리고 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때부터 현장을 누비며 축구에 무한 지지를 보내온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 축구나 선수들에 대한 비판이라도 하면 화까지 내면서 말리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이번에는 제발 우리 선수들을 마음껏 응원할 수 있도록, 협회가 축구 발전의 걸림돌이 되지 않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한다.

정 회장은, 삶의 전부라고 여겼던 축구에서 억지로 고개를 돌리는 이들의 분노와 절망의 깊이에 공감해야 한다. 그동안 쌓인 폐단과 무기력을 털고 혁신해야 한다. 새 청사진을 보여주며 이들에게 다시 경기장에서 만나자고 간곡히 설득해야 한다.

정 회장이 ‘기적적인 독일전 승리'를 앞세워 자신에게 향하던 월드컵 실패 책임론을 잠재우고 새 감독 선임 문제로 여론의 물꼬를 돌렸다는 정치공학적 오판에 다시 안주한다면, 심해에서 꿈틀대며 분출구를 찾는 축구팬의 분노가 언제 거센 태풍으로 변해 표류하는 배를 뒤집어 버릴지 모른다. 한숨을 돌린 것처럼 보이는 지금이 바로 정몽규 회장 체제의 진짜 위기다.

<보도2국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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