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콜롬비아를 2-1로 꺾고 2002년 한일 대회와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회에 이어 3번째로 월드컵 1라운드 통과 가능성을 열어 놓은 일본 선수들이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대회 초반 파란과 이변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일본도 이 대열에 끼어들었다.

일본은 19일 오후(한국 시간) 러시아 모르도비아 아레나에서 열린 2018년 국제축구연맹(FIFA) 러시아 월드컵 H조 조별 리그 콜롬비아와 1차전에서 2-1로 이겼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당한 1-4 패배를 설욕했다. 일본은 이 승리에 아시아 팀이 월드컵에서 남미 팀을 잡은 첫 번째 주인공이 되는 기쁨을 얹었다. 2002년 한일 대회와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회에 이어 3번째로 1라운드를 통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일단 가능성은 열어 놓았다.

일본은 잊을 만하면 세계 축구계에 놀랄 만한 결과를 하나씩 던지곤 한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메달(동)을 땄고 1999년 20세 이하 남자 월드컵(나이지리아)에서는 1981년 대회(호주) 카타르에 이어 아시아 나라로는 두 번째로 준우승했다.

2011년 여자 월드컵(독일)에서는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다. 1990년대 미국과 세계 여자 축구를 양분했던 중국이 이루지 못한 우승이었다.

1921년 축구협회를 만든 일본은 그해 국제축구연맹에 가입했다. 그런데 첫 A매치는 이보다 앞선 1917년 5월 도쿄에서 중국(오늘날 중국과 정치 체제가 다른)과 치러 0-5로 졌다. 이 경기는 제3회 극동아시아선수권대회(Far Eastern Championship Games, 오늘날 아시아경기대회 모체쯤 되는 대회)에서 이뤄졌다.

이 대회 축구 종목에는 일본과 중국, 필리핀이 출전했는데 일본은 필리핀에 2-15로 대패했다. 당시 필리핀에는 스페인과 필리핀 두 나라 선수로 뛴 폴리노 알칸타라라는 유명 선수가 있었다. 알칸타라는 15살 때 FC 바르셀로나에서 프로에 데뷔했는데 이 기록은 아직도 클럽 최연소 데뷔 기록으로 남아 있다. 좀 과장하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인데, 아무튼 일본은 이렇게 축구 역사를 시작했다.

일본 축구사에 가장 큰 스코어 차 A 매치 승리는 1967년 9월 27일 도쿄에서 치른 필리핀과 경기에서 기록한 15-0이다. 이 기록은 한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때 상황을 잠시 살펴본다.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1년여 앞둔 1967년 9월 막을 올린 축구 종목 아시아 지역 A조 예선에서 한국은 자유중국(오늘날 대만)을 4-2, 레바논을 2-0, 월남(남베트남)을 3-0으로 물리치고 같은 3승의 일본과 맞붙었다. 접전 끝에 두 나라는 3-3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한국은 필리핀, 일본은 월남과 경기를 남겨 놓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골 득실 차에서 +7로 +21의 일본에 크게 뒤져 있었다. 일본이 필리핀을 15-0이라는 기록적인 스코어로 이겼기 때문이다. 15골 이상으로 이겨야 한다는 부담 속에 한국은 필리핀을 5-0으로 이긴 반면 일본은 월남을 1-0으로 누르고 본선 티켓을 손에 넣었다.

일본으로서는 첫 올림픽 출전인 1936년 베를린 대회에 이어 28년 만에 자력으로 출전한 올림픽이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에는 개최국으로 자동 출전해 8강전에서 대회 준우승국인 체코슬로바키아에 0-4로 졌다. 김용식 선생이 유일한 한국인이자 주전으로 뛴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1회전에서 스웨덴을 3-2로 잡았으나 8강전에서 대회 우승국인 이탈리아에 0-8로 대패했다.

한국 축구가 멕시코시티 올림픽 예선 결과를 두고두고 아쉬워한 이유는 한국을 아슬아슬하게 따돌리고 본선에 오른 일본이 앞에 설명한 대로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메달을 땄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태국과 함께 멕시코시티 올림픽 축구 종목에 출전한 일본은 조별 리그 B조에서 나이지리아를 3-1로 꺾은 데 이어 브라질과 1-1, 스페인과 0-0으로 비겨 조 2위로 8강에 올랐다. 8강전에서 프랑스를 3-1로 잡은 일본은 준결승에서 우승국 헝가리에 0-5로 크게 졌으나 동메달 결정전에서 홈그라운드의 멕시코를 2-0으로 눌렀다. C조의 이스라엘(이때 이스라엘은 아시아에서 스포츠 활동을 하고 있었다)도 2승 1패로 8강에 오르는 등 아시아 나라들은 이 대회에서 선전했다.

3위 결정전에서 승리를 확정하는 2골 등 이 대회에서 7골을 터뜨리면서 득점왕에 올라 일본 축구의 영웅으로 떠오른 이가 가마모토 구니시게다.

그런데 그 무렵 일본 축구는 시행착오를 겪었다. 올림픽 메달에 우쭐해 ‘탈 아시아’를 선언하고 메르데카 등 아시아 지역 대회를 외면한 것이다. 올림픽 메달에 들떴지만 곧이어 열린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에서 호주와 한국에 밀렸고 1986년 멕시코 대회와 1994년 미국 대회 아시아 예선에서 거푸 한국에 밀리는 등 1998년 프랑스 대회에 나서기 전까지 월드컵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미국 월드컵 예선 때는 일본이 거의 손에 넣었던 티켓을 한국에 넘겼고 프랑스 월드컵 예선에서는 이미 본선 출전을 확정한 한국이 다소 느슨한 경기를 펼쳐 일본이 꿈에도 그리던 월드컵 출전권을 손에 넣었다.

일본은 올림픽에서도 메달을 획득한 멕시코 대회 이후 1996년 애틀랜타 대회에 출전하기까지 28년이나 올림픽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일본 축구는 한국을 의식하면서 발전한 측면이 없지 않다.

▲ 1938년 일본 축구 대표 팀에 선발된 한국인 선수들. 배중호 현효섭 김성간 김용식 이유형 선생(왼쪽부터) ⓒ한국 축구 100년사
일제 강점기인 1938년 파리 월드컵에 대비해 일본축구협회가 소집한 강화 훈련 명단에 한국인 선수가 김용식 선생 등 4명이 포함되는 등 1940년대 초반까지 일본 축구 대표 팀에는 연인원 40명 가까운 한국인 선수가 활동했다. 그만큼 일본 축구에 미치는 한국 축구 영향이 컸다. 베를린 올림픽에는 마지못해 김용식 선생만 뽑았지만. 일본은 자기들이 일으킨 중일전쟁 때문에 파리 월드컵 예선에 기권했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오늘날 인도네시아)가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월드컵에 나섰다.

일본이 축구 발전을 하는 과정에서 일으킨 큰 사건이 일제 강점기인 1934년 4월 벌어진 축구 통제 시도다. 조선 총독부 학무국은 한국 선수들 활약상이 뛰어나고 축구가 민족정신을 일깨운다는 판단을 하고 축구 통제를 시도했다.

학무국이 한반도 안에서 축구 경기와 학교 팀의 참가를 제한하기 위한 실시 방안을 세우고 있던 가운데 그 내용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일부에서는 학무국이 한국인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일부러 내용을 흘려 내보낸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었다. 축구 통제안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전조선 규모의 축구 대회는 1년에 한 차례에 한해 학무국장의 허가를 받아야 대회를 개최할 수 있다. *각 도 규모의 축구 대회는 도 체육협회(일본인 조직)와 축구연맹(일본인 조직)이 주최해야 한다 *두 개 이상의 도에 걸친 축구 대항전은 관계 도 체육협회와 축구연맹이 주최해야 한다 *축구 경기는 원칙적으로 토요일과 일요일에 치르되 평일은 학업에 지장이 없도록 오후 3시 이후에 치러야 한다.

학무국은 “종전의 축구대회는 학생들의 학업에 지장을 주고 대회 주최 측이 영리 목적으로 대회를 마구 개최하고 있기 때문에 축구 통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축구 통제 방안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평양에 있는 관서체육회였다. 통제 방안이 그대로 실시될 경우 조선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만 살아남게 되고 10년 이상 열려 왔던 관서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는 전 조선 규모가 아닌 일개 지방 대회로 전락하게 될 우려가 있었다.

1934년 4월 관서체육회 부회장 김병연과 상무이사 송석찬이 상경해 총독부 학무국 다케우치 체육 주사와 다카하시 직원을 만나 "관서체육회가 지니고 있는 전조선축구대회 개최의 기득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관서체육회의 “일본에서 오사카 아사히신문이 주최하고 있는 전일본중등학교야구대회와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이 주최하고 있는 전일본중등하교축구대회와 마찬가지로 관서체육회의 전조선축구대회도 대회 개최의 기득권을 인정해야한다”는 주장은 논리가 정연해 학무국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학무국의 다케우치 체육 주사는 관서체육회의 요구를 고려해 보겠다며 관서체육회 대표들을 돌려보냈고 결국 이 축구 통제 안은 폐기됐다.

불발에 그친 축구 통제 방안이지만 제국주의 일본이 스포츠도 식민 통치의 시각에서 바라봤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축구가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로 1992년 출범한 J리그를 꼽는 이들이 많다. 1983년 야구와 경쟁하느라 아마추어 팀 국민은행을 포함한 어정쩡한 프로 리그(슈퍼 리그)를 시작한 한국과 달리 일본은 치밀한 준비 작업을 거쳐 J 리그를 시작했다.

이때 이후 한일간 축구 경쟁은 신세대 팬들도 잘 알고 있어 굳이 기술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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