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유로 2016에 이어 아이슬란드의 ‘축구 동화’를 써 내려가고 있는 헤이미르 할그림손 감독은 현역 ‘동네 치과 의사’다.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글쓴이가 스포츠 팬이었던 1971년,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호주가 처음으로 출전했다.

그런데 경기장 입구에서 산 대회 프로그램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봤다. 호주 어느 선수 직업이 butcher로 적혀 있었다. 먼저 푸줏간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푸줏간은 butcher's (shop)일 것이다.

이 선수는 정육점을 운영하면서 주말에는 야구를 즐기는, 동네에서 야구를 제법 하는 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오픈 스탠스로 타격했던 게 기억에 생생하다. 그 대회에서 한국은 신용균 서정리 김응룡 박정일 배수찬 박현식 박영길 등이 활약한 1963년 대회에 이어  사상 두 번째 우승을 했다. 우승 멤버는 김호중 유백만 정동진 김응룡 한동화 강태정 강병철 하일 박영길 김우열 등이었다. 호주는 첫 출전인데도 대만을 제치고 출전 5개국 가운데 4위를 기록했다. 사회인 야구 팀이 야구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실상 프로 팀 하나를 제친 것이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초반 화젯거리 가운데 하나는 17일 밤 열린 조별 리그 D조 첫 경기에서 대회 첫 출전의 아이슬란드가 대회 2회 우승국 아르헨티나와 1-1로 비긴 것일 것이다.

이 경기가 끝나고 쏟아진 기사 가운데 아이슬란드 대표 팀 감독이 치과 의사라는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빈틈없는 '치과 의사' 아이슬란드 감독 "아르헨에 공간 주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기사도 있었다.

헤이미르 할그림손 감독은 19살 때부터 10년 동안 고향 축구 클럽에서 뛰었다고 한다. 이후 여러 클럽에서 활동했는데 그사이 고향에서 치과 의사로 환자를 돌봤고 유로 2016에 출전한 대표 팀 사령탑을 맡은 이후에도 짬짬이 치과 일을 했다고 한다.

할그림손 감독 사례를 보면서 ‘공부하는 운동선수’ ‘운동하는 학생’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운동선수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운동선수들이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잠시 살펴보자. 지난해 9월에 있은 프로 야구 2018년 신인 선수 2차 지명 회의에서 10개 구단은 964명의 신청자 가운데 10.36%에 불과한 100명만 이름을 불렀다. '취업률'이 10%대에 불과한 것이다.

10개 구단 체제가 된 뒤에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10여년 전인 2000년대 후반에는 6%~8% 수준이었다. 대체로 초등학교 3,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하니까 10년 안팎 운동에만 매달렸던 선수들 상당수가 해마다 운동이 아닌 다른 일로 먹고살 길을 찾아 나서야 하는 현실이다.

프로 야구가 출범한 1982년 가을, 구단 관계자와 기자 등 30여 명이 일본 프로 야구 현황을 알아보기 위해 도쿄에 갔다. 프로 야구의 20세기판 ‘신사유람단’이었다. 그때 묵었던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선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은퇴 프로 야구 선수 얘기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그는 1970년대 중반 일본 프로 야구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3라운드쯤으로 지명된 투수였다. 1군에 두어 차례 올라간 뒤 3년 만에 퇴출됐다. 선수층이 두꺼운 요미우리에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배운 것이 야구밖에 없었으니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일본 고교 야구는 운동과 공부를 함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야구 명문교의 경우 한국과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야구 선배의 도움으로 겨우 보험 회사에 취직했지만 입사 초기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얼마 안 돼 업무도 제법 손에 익고 운동선수 출신 특유의 끈기와 돌파력으로 회사 안에서 제법 인정을 받게 됐지만 보험 일이 야구보다 훨씬 더 힘들다며 술잔을 연방 들이켰다.

공부하는 운동선수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미국의 스피드스케이팅 영웅 에릭 하이든이 꼽힌다. 하이든은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미국 뉴욕주)  동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전관왕이다. 2018년 현재 동계 올림픽 빙속 사상 유일한 대기록이다. 단거리인 500m부터 장거리인 1만m까지 5개 종목 금메달을 휩쓸었다. 육상으로 치면 100m부터 마라톤까지 거리별 세부 종목에서 모두 정상에 오른 것이다.

하이든은 운동과 함께 위스콘신대학교 매디슨 캠퍼스에서 대학 생활을 열심히 했고 은퇴한 뒤 1991년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아버지 잭의 뒤를 이어 정형외과 전문의가 됐다. 하이든은 개업의이지만 미국 프로 농구(NBA) 새크라멘토 킹스와 2002년, 2006년, 2010년, 2014년 동계 올림픽 미국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단 팀 닥터로 일했다.

모든 운동선수가 할그림손이나 하이든처럼 돼야 한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생활인으로서 기본 소양은 물론 사회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일정 수준 이상 공부는 학창 시절에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쓴이 개인 일이어서 매우 쑥스럽지만 ‘운동하는 학생’ 사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글쓴이가 중학생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글쓴이 모교는 공부를 세게 시키는 학교였다. 학생들의 체육 활동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제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검도부와 탁구부 등이 자율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중학교에 진학해 배운 검도가 선수 수준인 친구들도 있었다. 육상 높이뛰기 중학부 지역 기록 보유자도 있었다. 모두들 입학시험을 쳐서 들어온 친구들이었다. 그 시절에는 중학교도 입학시험을 쳤고 이 친구들은 초등학교 때 운동부에 있었던, 이른바 ‘학생 선수’들이 아니었다. 글쓴이는 2학년 때 탁구부에 지원했다가 평균 점수가 기준에 모자라 퇴짜를 맞았다.

글쓴이가 다닌 고등학교는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유명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의 할아버지 격인 예비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 여름방학 동안 성적이 좋지 않은 3학년 학생들이 학교 시설에서 합숙하기도 했다. 2학년 때부터는 체육 수업이 아예 없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점수는 축구공을 담벼락에 대고 차거나 배구공을 토스하는 것으로 대충 매겼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운동 마니아는 있었다. 모교에는 훌륭한 체육관이 있어 농구부 훈련이 없을 때 일반 학생들이 열심히 농구를 했다. 3대3 길거리 농구보다 한 단계 위인 정규 농구 동아리도 있었다. 3학년 2학기 중간고사 때까지 선생님들에게 “너희들이 대학에 가면 어디를 어떻게 하겠다”는 꾸지람을 들으며 혼났던 글쓴이를 비롯한 농구 동아리 회원 모두 각자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다. 글쓴이는 소망하던 스포츠 기자가 됐고 ‘농구 친구들’ 모두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했다.

일반적으로 체육을 스포츠의 의미로 쓰고 있으나 체육도 엄연히 매우 중요한 교육의 한 분야다. ‘지덕체(智德體)’라고 해서 체육을 지육과 덕육 다음으로 부르고 있으나 체육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은 ‘체덕지’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저작권자 © SPOTV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