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회식에 입장하고 있는 한국 선수단. 한국은 이 대회에서 금메달 12개와 은메달 5개, 동메달 12개로 4년 전 서울 올림픽 성적(금 12 은 10 동 11)에 뒤지지 않는 성적표를 받았다. 북한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이후 12년 공백 끝에 이 대회에 출전했는데도 김영식의 동메달을 비롯해 금메달 4개(복싱 플라이급 최철수 기계체조 안마 배길수 레슬링 자유형 48kg급 김일 52kg급 리학선)와 동메달 5개(종합 16위, 일본 17위)로 2018년 현재 역대 최고 성적을 올렸다. ⓒ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45년 일제 강점기 해방과 함께 찾아온 70여년 남북 분단 역사에서 가장 많은 남북 교류가 이뤄진 분야는 무역을 뺀다면, 스포츠일 것이다. 그리고 남북 스포츠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때는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0년대 초반이다. 1990년 ‘남북통일축구경기대회’와 1991년 탁구, 청소년 축구 단일팀이 이때 이뤄졌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옛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들 참가로 동서 화합 무대를 만드는 데 성공한 노태우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북방 외교’를 적극적으로 펼쳐 나갔고 그런 가운데 남북 스포츠 교류도 활성화됐다.

글쓴이는 야구가 주 종목이었지만 운 좋게도 그 무렵 남북 스포츠 교류 현장에 함께할 수 있었다. 그때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옛 소련과 옛 동독 등 사회주의권에서는 오랜 기간 나라가 직접 관여하는 스포츠 체계에서 선수들을 발굴하고 육성했다. 체조 한 종목만 보더라도 베라 차슬라프스카(옛 체코슬로바키아) 나디아 코마네치(루마니아) 올가 코르부트, 넬리 킴(이상 옛 소련) 등 올림픽을 빛낸 수많은 선수들이 ‘국가 아마추어리즘’ 틀 안에서 성장했다. 허울은 아마추어이지만 프로에 못지않은 혜택이 주어졌다.

북한도 예외는 아닌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북한 레슬링 선수 김영식에게서 그 실상을 엿볼 수 있었다. 대회가 막바지로 내닫고 있던 8월 7일 바르셀로나체육대학 레슬링 경기장 앞 잔디밭에 여러 나라 취재기자들과 오전 경기를 마친 선수들이 모여 앉아 메인 프레스 센터와 선수촌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술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웬 술 냄새인가’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북한 선수 몇 명과 코치가 잔디밭에 앉아 있었다. 오전에 벌어진 자유형 57kg급 3위 결정전에서 이긴 김영식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서울에서 왔습니다.” “아, 그렇습네까. 반갑습네다. 앉으시라요.” 북한 코치가 반갑게 맞았다. “이번 대회에서 북쪽 성적이 비교적 좋네요. 축하합니다. 그런데 웬 술 냄새입니까.” “술 냄새가 납네까. 죄송합네다. 제가 어제 조금 많이 마신 것 같습네다. 죄송합네다.”

코치 옆에 앉아 있던 김영식이 머리를 주억거리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지금까지 술이 깨지 않을 정도로 마셨다면 꽤 많이 마셨을 텐데요.” 이때부터 김영식의 하소연이 시작됐다.

먼저 김영식의 화려한 선수 경력을 소개한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48kg급 금메달리스트인 김일과 함께 1990년대를 앞뒤로 북한 레슬링 자유형 간판 스타로 활약한 김영식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전까지 1986년 부다페스트(헝가리) 세계선수권대회 1위, 1987년 클레몽-페랑(프랑스) 세계선수권대회 2위(이상 52kg급), 1989년 마팅니(스위스) 세계선수권대회 1위(57kg급),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1위(52kg급) 등 52kg급과 57kg급을 오가며 세계 무대를 휩쓸었다.

김영식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57kg급으로 출전했다. 김영식으로서는 전성기인 1988년에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린 게 무척이나 아쉬웠을 것이다. 국제 무대 성적은 화려했지만 올림픽 메달이 없었던 김영식은 바르셀로나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금메달을 따고 싶었다.

김영식은 평양을 떠나올 때 애인에게 굳게 약속했단다. “꼭 금메달을 따서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김영식의 애인은 평양 시내에 쓸 만한 살림집도 마련하고 남부럽지 않게 살 꿈에 부풀어 있었을지 모르겠다.

여자 유도 계순희(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여자 마라톤 정성옥[1999년 세비야(스페인)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탁구 리분희[1991년 지바(일본)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등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인민 체육인’ 칭호를 받은 후배 선수들보다 먼저 인민 체육인이 될 만한 실력을 갖춘 김영식이었다. 김영식의 애인은 김영식이 평양을 떠나올 때 짐꾸러미 깊숙이 뭔가를 집어넣었다. 조금씩 마시고 힘을 내 금메달을 따라는 격려의 말과 함께. 그것은 뱀술이었다.

대회가 시작됐다. 컨디션도 좋았고 수분 조절[체중 조절]도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러나 김영식의 금메달 꿈은 조 편성에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레슬링 강국인 독립국가연합(EUN·옛 소련) 선수와 한 조가 됐고, 조 1위 결정전에서 그 선수에게 져 3위 결정전으로 밀려났다.

가슴이 터질 노릇이었다. 선수촌에 돌아왔으나 경기 장면이 자꾸 떠올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뱀술 한 병을 몽땅 마셔 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술 냄새를 풍기며 매트에 올랐다. 상대인 터키 선수는 고약한 술 냄새가 역겨웠는지 슬슬 꽁무니를 빼다 맥없이 졌다.

“나이가 꽤 됐지요. 운동을 계속할 건가요.” “이젠 그만둬야겠시요. 평양에 돌아가면 지도원 공부를 할까 합네다.”

프레스센터로 돌아온 글쓴이는 곧바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북한 레슬링 자유형 간판 김영식, 바르셀로나 올림픽 끝으로 은퇴’ 이 내용은 아마도 한국 기자가 쓴 북한 유명 운동선수 은퇴 관련 첫 번째 기사일 것이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올해 51살인 김영식은 북녘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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