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개막 다음 날인 9월 23일 베이징 외곽 펑타이 구장에서 만난 북한 여성 응원단원(오른쪽)과 글쓴이.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한국전쟁 이후 세대인 글쓴이가 북한 사람과 처음 마주친 건 1987년 2월 뉴델리에서 열린 제39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때였다. 1년 7개월여 뒤인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탁구 여자 복식 초대 올림픽 챔피언 조가 되는 양영자-현정화 조가 금메달을 차지한 대회다.

북한 경기가 있는 날에는 어김없이 30여 명의 인도 주재 북한 대사관 직원과 직원 가족이 응원을 나왔다. 여성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었는데 처음 보는 북한 사람이 생경했다. 북한 사람들과 접촉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서독 에센에서 벌어진 1987년 세계유도선수권대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60kg급 김재엽이 금메달, 95kg급 하형주가 동메달을 목에 건 이 대회에서는 한국 선수단이 준비한 김밥을 북한 선수들과 나눠 먹는 등 우호적인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 대회와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 선수들과 친하게 지낸 이창수(71kg급 동메달)는 1991년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세계유도선수권대회가 끝난 뒤 탈북했다.

이 대회 86kg급 은메달리스트인 박정철은 1981년 마스트리히트(네덜란드) 세계유도선수권대회 71kg급 우승자인 한국의 박종학 코치와 성도 같고 생김새도 비슷해 대회 기간 호형호제하며 지냈다. 뒤에 북한 유도 대표 팀 감독이 된 박정철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 한국의 정은순(농구)과 한반도기를 들고 함께 입장했다.

이는 1980년대 이후 이야기이고 1970년대 또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남북은 스포츠 분야에서 날카롭게 맞서고 있었다. 1980년 9월 쿠웨이트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안컵 준결승전을 예로 들 수 있다. 한국은 이 대회 B조 조별 리그에서 말레이시아와만 1-1로 비겼을 뿐 카타르를 2-0, 쿠웨이트를 3-0, 아랍에미리트연합을 4-1로 꺾고 조 1위로 4강에 올라 북한과 결승행을 다투게 됐다.

흑백 TV 시절 이 경기를 본 올드 팬들은 한국이 정해원의 연속 골에 힙입어 2-1로 역전승하자 마치 전쟁에서라도 이긴 듯 중계가 이뤄진 것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축구경기뿐만이 아니다. 이 무렵에는 종목을 막론하고 남북이 경기를 하면 사생결단을 하듯 싸우곤 했다.

그러나 1980년대 ‘탐색기’를 거쳐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를 계기로 남북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북한은 이 대회에서 유도 95kg 이상급 황재길 등 12개의 금메달을 차지했다. 금메달을 딸 때마다 북한 국기인 '홍람오각별기'가 게양되고 북한의 '애국가'가 연주됐다.

대회 기간 수없이 들어 곡조를 외울 정도가 된 중국 국가만큼은 아니었지만 귀에 익을 정도로 북한 국가를 들었다. 꽤 촌스러워 보였던 운동복에 새겨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글씨도 눈에 익게 됐다.

한반도기가 없던 때여서 남북이 공동 응원을 하면서 태극기와 '홍람오각별기'를 함께 휘두르는 어색한 장면을 펼쳐지기도 했지만 비교적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교류가 이뤄졌다.

대회 개막 직후 베이징 외곽 펑타이 구장에서 열린 소프트볼은 대회 첫 남북 경기였다. 1980년대에 두 차례 북한 사람들과 교류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북한 응원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빨간 바탕에 검은색 체크무늬 투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여성에게 먼저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서울에서 왔습니다. 운동 신문 기자입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예쁘장한 이 여성은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글쓴이가 얼른 상황을 파악했다. “운동 신문입니다.”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서 어떻게 오셨습니까.”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왔습니다. 꽤 많이 왔는데 모두 몇 명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초판 마감 시간에 쫓겨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질문에도 이 여성은 상냥하게 답했다. “대학을 나와 평양에 있는 기업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베이징까지) 어떻게 오셨습니까.” “평양에서 렬차 타고 왔습니다.”

평양에서 출발해 신의주와 단둥을 거쳐 베이징에 도착한 국제 열차를 이용한 것이다. 북한과 중국은 철도와 육로로 연결돼 있어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얼마든지 왕래할 수 있다. 대규모 응원단을 파견할 만했다.

1990년 9월 베이징에는 김일성 배지를 단 북한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시아경기대회에 온 북한 응원단이었다. 그 뒤 여러 경기장에서 만난 북한 응원단 가운데에는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와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그리고 2005년 인천 아시아육상경기선수권대회,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때 한국 스포츠 팬에게 널리 알려진 평양음악무용대학 학생도 있었고 청진사범대학 학생도 있었다.

대회가 중반을 넘어갈 무렵 한국 기자단 숙소 근처에 있는, 북한이 운영하는 류경식당에서 열린 남북한 유도 관계자 모임에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는 김병주(78kg급 금메달) 정훈(71kg급 금메달) 등 한국 대표 선수들과 북한 유도 중(重)량급 간판 스타 황재길(95kg 이상급 금메달)과 뒷날 북한유술(유도)협회 서기장이 되는 박학영(60kg급 동메달) 그리고 앞에 소개한 박정철(86kg급 동메달) 이창수(71kg급 은메달, 금메달은 한국 정훈) 등 남북한 메달리스트들이 거의 모두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대동강 잉어회와 룡성맥주 등에 이어 평양 냉면이 나온 이 회식 자리에는 북한 응원단 일부도 참석했다. 여성 응원단은 한국 탤런트 뺨치게 예뻤다. ‘남남북녀’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찌어찌해서 말을 트게 됐고 어느 학생에게 목에 거는 끈이 달린 볼펜을 선물로 줬다. 그런데 잠시 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선물을 받지 못한 또 다른 학생이 지도 교수인 듯한 남성에게 고자질을 한 것이다.

“저 언니가 남조선 기자가 주는 선물을 받았데요.” 상급생 언니의 미모에 밀려 선물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아무튼 샘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좋던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 앉았다.

글쓴이는 선물을 받은 학생에게 혹시 불이익이라도 갈까 봐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 교수인 듯한 남성은 “선물 받은 게 뭐이 어드래서”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게 아닌가.

고자질한 학생은 머쓱해졌고, 옆에 있던 다른 신문사 기자가 글쓴이가 준 선물과 같은 볼펜을 고자질한 학생에게 줘 분위기를 다시 잡았다.

30여년 전 이런 만남은 북한이 국제 열차로 대규모 응원단을 베이징에 보냈기에 가능했다.

일제 강점기가 배경인 영화 ‘암살’에서 재현한 경성역에서는 프랑스 파리로 가는 국제 열차가 출발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민족 영웅 손기정과 남승룡이 이 국제 열차를 탔다는 얘기가 전설이 아닌 현실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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