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독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던 1986년, 멕시코에서 열린 월드컵에 출전한 차범근(뒷줄 맨 왼쪽) 차범근부터 시계 방향으로 정용환 허정무 조영증 최순호 오연교 박창선 조광래 김주성 박경훈 변병주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글쓴이는 2013년 6월 17일 ‘손흥민에게서 차범근의 향기가 난다’는 졸고를 쓴 적이 있다. 그때로부터 4년이 흐른 19일, 기사의 주제가 차범근에서 손흥민으로 바뀌었다. 토트넘 핫스퍼의 손흥민은 이날 새벽 영국 레스터에서 열린 2016-2017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레스터 시티와 원정 경기에서 시즌 20, 21호 골을 잇따라 터뜨려 차범근이 1985-1986 시즌 서독 분데스리가 레버쿠젠에서 세운 시즌 19골을 단숨에 넘어섰다. 

손흥민의 기가 막힌 오른발 중거리 슛이 레스터 시티 골망을 흔드는 순간 글쓴이는 30년 전 일이 떠올랐다. 

1987년 11월 19일부터 22일까지 서독 에센에서는 남녀부가 통합된 첫 세계유도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창설 대회를 1956년 도쿄에서 개최한 남자부는 1985년 서울 대회까지 13차례 대회를 치렀다. 1980년 뉴욕에서 제1회 대회를 연 여자부는 1986년 마스트리히트(네덜란드) 대회까지 4차례 대회를 남자부와 격년으로 치렀다.

첫 통합 대회에서 한국은 남녀 8체급에 모두 출전해 남자 60kg급 김재엽이 금메달, 95kg급 하형주와 78kg급 이쾌화가 동메달을 따냈다. 그러나 막 걸음마를 뗀 여자부는 메달을 획득하지 못했다. 뒷날 66kg급에서 세계선수권(1993년 캐나다 해밀턴 대회, 1995년 일본 지바 대회)과 올림픽(1996년 애틀랜타 대회) 금메달을 거머쥐게 되는 서울체육중학교 2학년 조민선이 48kg급에서 16명이 겨루는 3회전에 오른 게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대회는 서울 올림픽을 10개월여 앞두고 열려 유도 기자 대부분이 원정 취재에 나설 만큼 비중이 높았다. 그 무렵 글쓴이의 주 종목은 야구였다. 유도는 부 종목이었다. 그런데 글쓴이는 대회 기간 유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축구 기사를 송고하게 됐다. 대회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와 보니 에센에서 보낸 축구 기사가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사연은 이렇다. 

그 무렵 ‘차붐’ 차범근은 서독 분데스리가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레버쿠젠에서 뛰고 있었다. 대회의 비중을 알고 있었는지 차범근은 아내 오은미 씨와 함께 자동차로 아우토반을 몇 시간을 달려 유도 국가 대표 선수들을 응원하러 왔다.  

한국 선수단이 묵고 있던 호텔 라운지에서 차범근과 인터뷰했다. 기사의 전체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분데스리가에서 10시즌 100골을 채우고 싶다”는 게 골자였다. 25살 때인 1978-79 시즌 다름슈타트에서 분데스리가 활동을 시작한 차범근은 당시 이미 34살이었다. 공군에서 군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연장 복무를 해야 하는 황당한 일을 겪는 등 그 시절엔 외국 진출이 결코 쉽지 않았다.

차범근은 요즘 시각으로 보면 우스운 일이지만, 국가 대표 팀 합류 여부를 놓고 찬반 양론이 격렬하게 맞붙었던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뛰었고 분데스리가에서 선수 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차범근은 2년 뒤인 1989년 308경기 출전 98골(모두 필드 골, 컵 대회 27경기 13골 유럽 클럽 대항전 37경기 10골 별도)의 빛나는 훈장을 달고 고국에 돌아왔다. 눈에 띄는 기록이 하나 더 있다. 상대 수비수들의 악의적인 반칙으로 여러 차례 부상했지만 자신은 딱 한 장의 경고 카드만 받았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본다. 

1978년 12월 국내 스포츠계는 차범근의 서독 분데스리가 진출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1962년 백인천이 일본 프로 야구 도에이 플라이즈에 입단한 이후 가장 크게 화제를 모은 뉴스였다. 

차범근은 경신고에 다니던 1971년 청소년 대표로 선발돼 일본에서 열린 제13회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이스라엘에 0-1로 져 준우승했다. 이때 이스라엘은 AFC(아시아축구연맹) 회원국이었다.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는 1959년 AFC 회장인 말레이시아의 압둘 라만 총리가 주창해 창설된 아시아 지역의 유일한 청소년 축구 대회였지만 유럽 쪽 스카우트 관계자들에게는 관심 없는 대회였다. 차범근은 고려대학교 1학년 때인 1972년 제14회 대회(태국)에 출전했으나 또다시 이스라엘에 0-1로 져 준우승에 그쳤다. 

청소년 수준을 넘어서는 뛰어난 기량을 갖고 있었던 차범근은 대회 직후 곧바로 국가 대표 팀에 뽑혀 그해 5월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안컵에 이세연, 김호, 이회택 등 선배와 함께 출전했다. 19살 때였다. 이 대회 크메르(오늘날의 캄보디아)전에서 4-1로 이길 때 박수덕, 이회택에 이어 3번째 골을 넣어 A매치 첫 골을 기록했다. 같은 해 7월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제16회 메르데카배국제대회 결승에서는 하프라인부터 단독 질주해 2-1로 우승을 확정하는 결승 골을 터뜨렸다. 

1976년 제6회 박대통령배국제대회 말레이시아전에서는 후반 7분을 남겨 놓을 때까지 1-4로 뒤지던 경기를 남은 시간 동안 세 골을 몰아쳐 4-4 무승부로 만드는 등 탈(脫) 아시아 수준의 경기력을 보였으나 차범근의 활동 무대는 아시안컵, 메르데카배대회, 킹스컵, 박대통령배대회 등 아시아 지역에 한정돼 있었다. 

아시아 지역 선수가 축구의 본고장으로서 오래전부터 수준 높은 프로 축구가 성행하고 있던 유럽 무대로 나아갈 기회를 잡기가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차범근은 1978년 5월 도쿄에서 열린 재팬 컵 등 유럽 쪽 스카우트 관계자들에게 자신의 기량을 보여 줄 수 있는 몇 번 되지 않는 기회를 살렸고 그해 12월 분데스리가 다름슈타트와 가계약을 맺고 한국 축구 선수로는 처음으로 유럽 그라운드를 누볐다. 

차범근은 이후 공군 복무 잔여 기간을 마친 뒤 1979년 6월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했다. 1983년에는 당시 기준으로 분데스리가 최고액 이적료인 135만 마르크에 레버쿠젠으로 이적했고, 1989년 은퇴할 때까지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유니폼 상의 반쪽은 붉은색 반쪽은 흰색인 경신고등학교 유니폼, 상의 왼쪽 가슴에 호랑이 마크가 새겨진 붉은 줄무늬 고려대학교 유니폼을 입은 ‘청년’ 차범근을 추억하게 해 준 손흥민에게 지면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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