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 경기를 하고 있는 한국과 북한 여자 축구 대표 팀 ⓒ 대한축구협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정부가 체육과 인권 분야의 남북회담 시나리오 개발에 나섰다고 한다.

30일 자 연합뉴스에 따르면 통일부 남북회담본부는 '북한 인권·체육 분야의 회담 시나리오 및 대책 개발'을 위한 연구 용역을 발주했다. 남북간 인권 대화나 체육회담이 진행될 때 협상 전략을 마련하고 회담 의제를 발굴하기 위한 것으로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남북 사이에 본격적인 대화 국면이 펼쳐질 때를 대비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스포츠계에서는 본격화하게 될 남북 스포츠 교류에 대한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 당장 내년 2월에는 평창 동계 올림픽이 열리고 8월에는 자카르타 하계 아시아경기대회가 벌어진다. 두 대회 모두 남북 스포츠 교류가 본격적으로 재개될 때 작지 않은 의미를 갖게 된다.

평창 동계 올림픽에 북한이 출전하면 남북 체육 교류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된다. 북한은 그동안 한국에서 열린 여러 대회에 출전했다. 2002년 부산과 2014년 인천에서 각각 열린 하계 아시아경기대회와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올림픽은 평창 동계 대회가 처음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분산 개최’ 문제를 비롯한 복잡한 과정을 거친 끝에 북한이 참가하지 않았다.

2018년 아시아경기대회는 제3국에서 열리지만 한국과 북한 체육인들이 대규모로 만날 수 있는 대회다. 1974년 테헤란 대회에서 아시아경기대회에 데뷔한 북한은 이후 1986년 서울 대회와 1994년 히로시마 대회에만 불참했고 꾸준히 아시아인의 스포츠 잔치에 참여하고 있다. 1990년 베이징 대회에는 대규모 선수단은 물론 적지 않은 크기의 응원단을 꾸려 국제 열차편으로 베이징에 보냈다. 이 대회는 뒤에 상술하겠지만 스포츠 팬들이 기억하고 있는 탁구와 청소년 축구 남북 단일팀(유일 팀)이 꾸려지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남북 스포츠 교류 역사에 상당한 의미가 있다.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면서 북위 38도를 경계로 남북이 분단되기 전까지 한반도 남쪽과 북쪽은 활발하게 스포츠 교류가 이뤄지고 있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생은 평안북도 신의주가 고향이고 동메달리스트 남승룡 선생은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1946년 3월 서울에서 열린 축구와 농구 경·평전을 끝으로 남북 스포츠 교류의 문은 닫혔고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벌어진 남북 상잔의 비극적인 한국전쟁으로 남북은 스포츠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사실상 단절됐다.

1950년대 남과 북은 각자 스포츠 활동을 벌여 한국은 1954년 헬싱키와 1956년 멜버른 하계 올림픽,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등에 나섰고 북한은 1956년 파리 세계여자배구선수권대회 와 1959년 모스크바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등 종목별 세계 대회에 출전했다.

남과 북이 스포츠 교류의 물꼬를 튼 계기는 1964년 도쿄 여름철 올림픽이다. 이때 남북한과 같은 처지의 동독과 서독은 1956년 멜버른, 1960년 로마 올림픽에 독일 단일팀으로 출전한 터였다.

1962년 6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59차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는 남북한이 올림픽에 단일팀으로 출전할 것을 권유하고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북한을 별개 팀으로 참가하도록 하겠다고 결의했다. 이때 IOC 위원장은 아마추어리즘의 신봉자이자 ‘지한파’로 알려진, 실제로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해 국내 체육인들과 친밀하게 교류한 에이버리 브런디지였다.

KOC(대한올림픽위원회)는 8월 IOC의 결의를 받아들였고 이듬해인 1963년 1월 24일 IOC의 중재로 남북 단일팀 구성을 위한 첫 회담이 스위스 로잔에서 열렸다. 이어 홍콩으로 자리를 옮겨 제2차 회담, 제3차 회담을 잇따라 열었다. 체육계로서는 이 회담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1945년 분단 이후 남북 관계자들이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를 마련했다는 데에 나름대로 의의를 부여할 수 있었다.

IOC 관계자들이 배석한 가운데 진행된 로잔 회담에서 남북 양측은 *단일팀 구성에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국가는 광복 전에 부르던 '아리랑'으로 하고 *국기는 오륜 마크 밑에 영문자 'KOREA'로 잠정 결정하며 *선수 선발은 동·서독 단일팀의 사례에 준한다는 등의 사항에 합의했다.

남북 대표단이 대부분 교체된 가운데 5월 17일 홍콩에서 속개된 제2차 회담에서 남 측은 선수단의 호칭을 '남북한 단일팀' 또는 '전한(全韓)팀'을 제시했고 북 측은 '전 조선 유일 팀' 또는 '남북 조선 팀'을 주장해 양측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이 문제는 다음으로 미루고 선수 선발 등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토의를 시작했다. 남 측이 종목별 특성을 고려해 원칙 문제만 이 회담에서 합의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종목별 경기 단체에 위임하자고 제의한 반면 북 측은 선수 선발을 위한 예선 일시 및 장소를 이 회담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강력히 맞섰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양측은 제3차 회담 일시와 장소를 IOC를 거쳐 결정한다는 등의 합의를 하고 회담을 끝냈다. 그런데 제2차 회담을 마치고 돌아간 북 측 대표단이 평양방송으로 제2차 회담이 마치 남 측 대표단의 무성의로 난관에 봉착했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다음 회담의 날짜와 장소 문제가 혼선을 보였고 IOC의 조정으로 7월 26일 홍콩에서 회담이 다시 열리게 됐다.

홍콩에 도착한 남 측 대표단은 회담에 나서는 북 측 대표단의 불성실한 자세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북 측도 즉각 반박 성명을 발표하면서 양측 대표단의 접촉이 이뤄지지 않았다. 양측 연락관 접촉으로 회담 절차에 대한 이견 조정에 들어갔으나 남 측이 평양방송의 비난 선전에 대해 북 측 대표단의 해명과 사과를 요구하자 북 측 연락관이 자리를 뜨면서 역사적인 첫 남북 체육 회담은 결렬됐다.

애초 북 측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도쿄 올림픽 단일팀 출전보다는 도쿄 올림픽에 단독으로 출전하고자 하는 의도를 관철했고 나아가 1963년 10월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정회원 자격을 승인 받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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